김대중 서거 10주기 학술대회 발제문 요약문 [전문]
16일 광주 동구 국립아시아문전당 국제홀서 개최

발제문 요약문 [전문]

근대 국가에서 국가운영책·국정운영역량·국가통치술(virtù. leadership, statecraft. presidentiality)은 한 나라의 명운과 성쇠를 좌우한다. 사실 제도 의 문제이건 개인의 문제이건 근대정치(학)의 핵심은 이 문제가 중심이다.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 국민통합, 발전과 안정, 외교안보와 평화는 다시 중대 기로에 서 있다. 어디에서 해법의 단초를 찾을 것인가?

간단하게 말해 김대중의 국가운영의 요체, 즉 정치연합과 국민통합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국가리더십의 건설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정당 및 의회정치의 연합과 연대와 협치의 능력에 달려있다.

ⓒ예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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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분단, 통일, 역사, 외교의 문제와 같은 이념문제와 민족문제와 같은 갈등의제의 돌파와 극복은 연합의 능력 자체에 거의 모든 것이 달려있다.

1997년, 건국 이래 최초의 정치연합을 통한 김대중의 승리로 인해 현대한국정치에서 선거를 통한 최초의 정권교체가 실현되었다.

특히 1997년 정권교체는 DJP 정치연합의 산물이다. 타협이야말로 정치소생과 부활의 요체이다. 1960년, 1961년, 1979-80년, 1987년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 모든 정권교체는 혁명, 쿠데타, 암살, 항쟁과 같은 폭력의 산물이었다.

여기에 1997년 대통령 선거의 현실적이며 이론적인 의미가 존재한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그가 이러한 연합과 연대의 통합적 국정운영 방식을 집권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견지하려하였다는 데에 있다.

김대중은 정치연합을 통해 정권교체에 성공하였고, 그를 통해 통합적 리더십을 발휘하여 민주주의 발전, 국가위기극복, 국민통합, 사회적 대타협, 남북화해를 추구하여 상당 부분을 성취하였다.

나아가 전방위 외교관계의 구축도 달성하였다. 연합과 연대의 정치가 초래한 주목할 만한 다면적 다층적 다성적(多聲的) 파상(波狀)효과였다.

그 점에서 그의 국정운영 리더십의 요체는, 의도를 넘어 결과에 책임을 지는 책임정치와 책임윤리의 실현이었다.

무엇보다도 국가위기 극복을 포함한 결과에 대한 책임윤리를 민주적 리더십을 통하여 달성하였다는 점에서 그는 전후 그에 앞선 한국의 권위주의 리더십들, 또는 실패한 리더십들과 뚜렷이 구별된다.

그것은 노무현을 제외한, 이후의 리더십들과도 구별된다. 우리는 종종 ‘정치’(politics)가 이미 다면, 다성, 다층의 의미를 처음부터 갖고 있다는 점을 잊는다.

즉 독임정치, 단독집권이 마치 책임정치인 것처럼 오해하고 있는 최근 한국의 민주개혁세력들은 김대중의 통합적 국정운영이 바로 책임정치의 요체라는 점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김대중에 관한한 아래로부터의 통합 역시 마찬가지다. 특별히 김대중 집권 시기 동안의 세 번의 국민통합은 주목할 만하였다.

첫 번째는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전국적인 금모으기 운동이었다. 두 번째는 남북정상회담이었다. 당시 국민 모두는 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을 열렬하게 지지하였다. 세 번째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이었다.

당시 월드컵은 아시아에서의 첫 월드컵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성적 역시 월드컵 참가 최초의 4강 진출이라는 최고라서 거리응원, 붉은 악마, 히딩크 신드롬과 함께 온 국민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물론 김대중 리더십에는 몇몇 한계도 있었다.

첫 번째는 내각제 개헌에 대해 합의하였으면서도 임기 동안 진정성을 갖고 개헌을 추구한 적이 없었다는 점은, 타협의 핵심 고리에 대한 신뢰의 문제를 제기하기에 충분하였다.

특별히 그에게 내각제 개헌의 합의는 정치연합 형성과 정권교체의 골간 요소였다는 점에서 개헌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두 번째는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구조조정과정에서 재벌체제 개혁에 소홀히 한 점이었다.

이 점은 이후 한국사회가 노사정 사이의 균형이 급격하게 붕괴된 신자유주의체제로 진입하였다는 점에서, 즉 정부와 노동과 기업의 균형에 바탕한 좀 더 정교한 노사정 타협 모델을 창출했어야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였다.

세 번째는 정치적 거인 김대중 자신이 물러났을 때에도 작동 가능한 정치연합 및 사회타협, 그리고 남북관계와 외교관계의 제도화와 연속성의 확보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 점은 김대중 개인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기 임기 내에 이미 정치연합이 붕괴된 것은 뚜렷한 한계였다.

또 임기 내에 실현했던 한·미, 남북, 한·중, 한·일, 한·러 관계의 최절정의 시기에 북핵문제와 남북관계, 그리고 한반도평화의 장구한 제도적 안전장치를 마련하지 못한 아쉬움도 크다.

이후 국내-남북-국제를 잇는 김대중과 같은 넓고 깊은 시야와 통합능력을 갖는 지도자를 다시 갖기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였다.

다시 강조컨대 한국은 정치연합이 거의 불가능한 승자독식의 헌법구조를 갖고 있다.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는 세계 최고 수준의 갈등을 노정하며 문제의 민주적 해결에 실패해오고 있다.

그에 따라 거의 모든 인간지표들은 OECD 최악 수준을 노정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실존 상황에서 현행 국가헌정제도는, 정치와 경제의 각각의 과두구조가 만나 극단적인 갈등과 불평등을 상호 강화하는 대통령제와 재벌체제를 넘어, 시민의 의사가 비례적으로 반영되는 의회책임제와 반대통령제의 방향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럴 때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타협을 통한 갈등의 해소와 안정의 증대이다.
/정리: 김대중 서거 10주기 광주행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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