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광주 동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국제홀서 개최

발제문 요약문 [전문]

해방 후 한국 사회 앞에 놓인 큰 과제로는 크게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는 남북분단을 극복하고 평화롭게 사는 것이다. 둘째는 민주주의 제도의 정착과 공고화이다. 셋째는 경제발전과 복지국가 건설이다.

김대중의 삶은 우리시대에 부여된 이 세 가지 과제를 해결하는 데 바쳐졌다. 한 마디로 김대중의 삶은 한국 현대사 그 자체였다.

김대중이 국민들에게 확고한 역사관을 가진 유능한 정치인으로 강하게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그가 1971년 제1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면서 부터였다.

이용섭 광주광역시장이 16일 오전 동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국제홀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 서거 10주기 학술대회'에 참석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삼남인 김홍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 등 참석자들과 묵념을 하고 있다. ⓒ광주시청 제공
이용섭 광주광역시장이 16일 오전 동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국제홀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 서거 10주기 학술대회'에 참석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삼남인 김홍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 등 참석자들과 묵념을 하고 있다. ⓒ광주시청 제공

그는 대통령 선거에서 4대국 안전보장과 평화통일론, 평화적 정권교체, 대중경제론 등을 제시하며 정책선거를 주도했다. 그는 선거에서 패배했지만 국민적 지지도에서는 사실상 승자였다.

김대중은 1971년 대통령 선거에 패배하고 박정희 유신체제와 전두환 체제 하에서 납치와 사형, 연금 등 숱한 정치적 탄압을 받았지만 거기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해졌다.

그는 감옥과 연금 등 고난의 시절을 오히려 독서 등을 통해 지적 성숙의 기회로 삼았다.

그는 시간이 갈수록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라 명확한 정치적 비전과 철학을 가진 정치인, 그리고 때로는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정치인 김대중에게 어느 순간부터 ‘선생님’이란 칭호가 따라붙게 되었다.

김대중은 1980년대에 이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폴란드의 레흐 바웬사(Lech Walesa), 체코슬로바키아의 바츨라프 하벨(vaclav Havel)과 함께 세계 4대 인권운동 지도자로 분류되었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 이미 남북문제와 관련하여 햇볕정책이라는 고유의 비전과 실천전략을 제시했고, 싱가포르 총리 리콴유와의 논쟁에서 아시아에도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논리를 설파했다.

김대중의 삶과 가장 유사한 면모를 보인 외국 정치인으로는 빌리 브란트(Willy Brandt)를 들 수 있다.

햇볕정책은 전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과 유사하다. 김대중은 브란트가 서독의 외무장관을 맡았던 1966년부터 서독의 외교정책과 브란트의 동방정책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는 1972년 연설에서 브란트가 동방정책에서 “동독을 그대로 인정하고 준 국가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교류를 확대해 나가고 있다”고 소개하고 그러다보면 “결국 독일민족끼리 자주 만나고, 서로 동질성이 형성되고, 어느 시기에 가서 독일민족끼리 통일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어느 누구도 막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브란트의 동서독 화해협력 정책, 유럽 평화속의 독일정책, 민족동질성 유지와 공존을 통한 ‘절반의 통일론’은 김대중의 남북 화해 협력 정책, 4대국 안전보장론, 남북연합 단계를 거친 점진적 통일론 등과 매우 유사한 면모를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햇볕정책의 골격은 이미 1970년대 초에 형성되었고,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햇볕정책의 롤 모델(role model)이었다고 볼 수 있다.

브란트와 김대중은 출생(사생아와 서자), 고졸학력, 변방지대에서의 정치활동 시작, 높은 독서열, 망명, 만년 야당, 색깔공세로부터의 피해, 여러 차례의 정치적 패배,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 민족 화해정책(동방정책과 햇볕정책), 노벨평화상 수상 등 많은 점에서 유사성을 띠고 있다.

김대중은 1997년 최초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어 한국 민주주의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IMF 위기 극복과 IT 산업 육성, ‘햇볕정책’을 통한 남북관계 개선, 기초생활보장제를 통한 복지제도 구축 등 많은 업적을 남기며 유능한 국가경영자로서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그의 이런 삶과 업적들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아 2000년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2009년 사망 직전까지 위기에 빠진 민주주의를 걱정하며 지냈다.

다시 불거진 북핵위기에 대해서는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 수교 등을 포함한 일괄타결론을 주장했고, 이 해법은 오늘날도 거의 유일한 대안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렇게 김대중은 젊은 시절부터 사망 직전까지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라는 비전과 목표를 내걸고 일관된 삶을 살았다.

김대중이 꿈꾼 비전과 목표는 독재와 ‘빨갱이 논리’가 팽배한 남한 정치에서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를 드나들게 했으나 김구나 조봉암과 달리 그는 살아서 대통령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는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 ‘반보만 앞서가라’는 그의 고유한 정치철학과 역사관, 그리고 그가 추구한 자유와 민주주의, 평화 등 보편적 역사관이 글로벌 리더로서 국내는 물론이요 전 세계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 그의 3대 신앙 즉 국민, 역사,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도 그로 위기를 극복하고 목표를 이루게 만든 큰 힘이 되었다.

김대중에게 많은 영향을 준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척박한 자연환경 등 적절한 도전은 문명의 발달을 촉진시키지만 그 도전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너무 강할 때는 아예 세상에 빛도 못보고 유산하거나 도중에 소멸해버린다고 설명했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김대중에게 가해진 가혹한 도전은 보통의 사람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강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시련을 이겨냄으로써 그 시련들은 결과적으로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되었다.

그의 이런 도전적 삶은 정치인들에게는 비전과 지조의 중요성을, 청소년들에게는 꿈과 성실함의 중요성을,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용기와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 정치인으로서 김대중은 사라졌지만 사상가로서, 교육자로서 김대중은 영원히 우리의 가슴에 남게 될 것이다.

김대중은 역사가 그의 행동을 정당하게 평가해줄 것이라고 믿으며 온갖 역경을 이겨냈고 국민에게 봉사했다. 전국의 민주평화세력과 호남인들이 김대중의 그런 역사관에 적극 호응했다.

특히 호남인들의 절대적 지지는 김대중이 단순히 호남 출신이기 때문이 아니라 김대중과 호남인들이 추구한 목표와 가치 즉 자유와 민주주의, 평화, 지역균형발전, 정의 등이 같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호남인과 김대중은 지난 50여 년 동안 굳건하게 결합하여 한국 역사를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세계는 이미 김대중을 20세기의 거인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에서는 지역주의 및 남북대립으로 인해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는 아마도 지역주의가 약화되고 남북관계가 좋아진 후에나 가능할 것 같다. 결국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위해서라도 남한의 민주주의를 더욱 공고히 하고 남북평화운동에 매진해야겠다.
/정리: 김대중 서거 10주기 광주행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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