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이던 아버지의 고향 북한 ‘평원군 한천면 감팔리' 못 보고 세상과 이별
20살 때 계엄군 무자비한 만행에 맞서 자발적으로 5ㆍ18시민군으로 활동
옛 전남도청보존에 앞장...투병 중에도 5ㆍ18자료 챙긴 ‘영원한 5ㆍ18지킴이’

1980년 5ㆍ18광주민중항쟁 당시 계엄군의 무자비한 만행을 목격하고 자발적으로 총을 들었던 현동한(59) 5ㆍ18시민군이 평생 소원이었던 '통일'을 못보고 간암 투병 중에 8일 세상을 떠났다.

5.18부상자회원 겸 오월을 사랑하는시민모임 고문으로 활동해왔던 고 현동한 5.18유공자는 만20세에 5.18광주민중항쟁과 맞닥뜨린 후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낮은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며 1남4녀의 생계를 이어왔다.

고인은 최근 병원 입원 전까지 짧게 근무했던 광주시 교통약자이동지원센터 운전직 노동자 생활이 첫 월급 직장이었다.

'영원한 5.18지킴이' 고 현동한(59) 5.18시민군이 8일 새벽 간암 투병 중에 사망했다. 고인의 빈소는 광주 남구 송암동 VIP장례식장 501호에 마련됐다. ⓒ박형진 제공
'영원한 5.18지킴이' 고 현동한(59) 5ㆍ18시민군이 8일 새벽 간암 투병 중에 사망했다. 고인의 빈소는 광주 남구 송암동 VIP장례식장 501호에 마련됐다. ⓒ박형진 제공

이 전에는 다양한 소규모 자영업을 해오다가 몇 년 동안은 전국을 돌며 김밥, 과일 노점상으로 전전하기도 했다.

고인은 이런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5.18유공자를 명분으로 자신의 사욕을 챙기지 않는 것으로 주변 동지들은 기억하고 있다.

특히 고인은 정부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건립 차원에서 막무가내로 추진했던 옛 전남도청 철거 정책에 맞서 시민사회 그리고 5.18단체들과 함께 ‘5.18최후항쟁지 옛 전남도청보존투쟁’에 앞장섰다.

고인은 누구보다 한반도 통일을 염원하며 평생 한 번이라도 아버지의 형제와 조카들이 살고 있을 북한 '평안남도 평원군 한천면 감팔리 158번지'를 밟아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고인의 부모님은 우리 현대사의 깊은 아픔과 생채기를 고스란히 짊어졌었다. 고인의 부친은 1950년 6.25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으로 참전했다가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석방돼 국군으로 편입돼 육군31사단에서 상사 계급으로 전역한다.

고인의 부친은 전역 후 건설현장 일용노동자로 전전하던 중에 작업장에서 추락사로 사망한다. 고인은 평생 부친의 죽음을 의문사로 규정해왔다.

고인은 생전 가까운 지인들에게 “부친이 일용노동자 생활 중에 이북 고향 생각이 날 때면 가끔씩 술을 마시며 북한 노래를 부르셨다”고 들려주기도 했다.

고인의 어머니도 빨치산 활동을 했던 첫 남편이 입산한 후 생사를 모르다가 군인으로 살고 있던 고인의 부친을 만나 두 번째 결혼생활을 하며 고 현동한 유공자를 얻었으나 남편이 건설현장에서 사망하면서 자식들을 홀로 키웠다.

고인의 어머니는 광주 동구 학동시장에서 죽 장사로 어렵게 생계를 책임지면서도 주변의 부랑자와 넝마주이 그리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자신이 만든 죽을 양껏 베풀었다고 한다.

이처럼 고 현동한 5.18시민군은 부모의 기구한 삶과 함께 스스로 겪은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을 고스란히 안고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낮은 사람들과 현대사의 질곡을 헤쳐 나왔다.

8일 새벽 사망한 고 현동한 5.18시민군 영정. ⓒ박형진 제공
8일 새벽 사망한 고 현동한 5ㆍ18시민군 영정. ⓒ박형진 제공

2009년 옛 전남도청보존운동 당시에는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자비로 촬영 장비를 마련하여 ‘5.18최후항쟁지’ 곳곳을 직접 카메라에 담아내는 열정을 쏟기도 했다.

또 옛 전남도청보존운동을 함께한 사회단체 일부 후배들을 수시로 불러 자장면 파티를 여는 등 따뜻한 공동체의 정을 몸소 보여주었다.

고인은 지난 2018년 뒤늦게 발견한 간암과 투병 중에도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모아온 5.18자료들과 취재사진 정리 등을 부탁하는 등 끝까지 5.18을 껴안고 8일 새벽 5시28분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유족으로는 1남4녀. 빈소: VIP장례식장 502호. 발인은 10일 오전7시 40분. (062)521~4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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