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집단적 신명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마을 어르신들의 얘기를 들으니 여느 마을과 같이 송산마을도 자연스런 공동체문화로 대보름 지신밟기 놀이가 있었던 때가 3~40년이 넘은 모양이다. 누구는 30년이라 하고 누구는 40년이 넘었다 하니 대보름 불놀이 전통이 끊긴 때가 70년대 안팎인 것은 분명하다.
 
 이후 우리나라 대보름 놀이는 마을사람들의 삶의 과정과는 상관없이 보존해야할 전통문화로 박제화되어 볼거리로 전락하거나 과도하게 기획된 전문놀이패의 행사로 그 명맥을 유지해 온게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가장 중요한 마을사람들의 자발적이고 집단적인 에너지가 결여되어 있었다.

 이미 기계로 농사 지으며 끈끈한 정의 품앗이와 집단적 육체의 노동리듬을 상실한 농촌마을에서 대보름 잔치가 가능할 것인가 우리는 주저했다. 더구나 마을창고에 먼지를 뒤집어 쓰고있는 꽹과리며 북이며 장구며 징을 끄집어내 먼지를 털고 햇볕에 말린다한들 몇 사람이나 장단을 맞추어 두들길 수 있을 것인지 다들 우려했던 것이다.

 비록 육체는 늙어 이런저런 준비를 함께 할 수는 없지만 마을의 전통과 삶의 지혜를 오롯이 기억하고있는 마을 어르신들을 먼저 만났다. 대보름날 달맞이놀이를 하자고 하니 다들 너무 좋단다. 한 할머니는 당신이 40년 전에는 농악을 치며 훔씬훔씬 놀았다고 꽹과리를 두들기기도 하신다.

 마을청년회는 먼저 움직였다. 마을 뒷산에 빙 둘러 마치 보름달을 그리듯 며칠에 걸쳐 산책로를 만들었다. 느린 곡선을 그으며 흐르는 탐진강과 멀리 장흥읍과 강진읍을 여유롭게 내려다 볼 수 있는 정상에 너른 쉼터도 만들었다.

 마을사람들과 방문객들의 아주 좋은 산책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마을앞 강변에 왕벚나무 20여그루와 강변을 따라 아주 많은 개나리를 심었다. 보름날 마을부녀회 5~60대 아짐들은 오곡밥과 나물을 준비하기로 하셨다. 옛날 가락이 남아있는 아짐들은 보나마나 흥에 겨워 장구며 북을 칠 것이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상쇠가 마을에는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집집마다 지신밟기를 하려는데 상쇠가 없는 것이다. 분명 돌아가신 어른 가운데는 아주 멋진 상쇠가 있었을진대 맥이 끊겨 미쳐 전승 받은 이가 없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마을 바깥에서 문화활동을 하는 젊은 상쇠를 불러오기로 했다. 젊은 상쇠는 한 걸음 더 나가 달집을 태울 때 강강수월래를 하잔다. 원무를 추며 노래를 이끌 소리꾼도 함께 오겠단다.

 이렇게 해서 자꾸 판은 커갔다. 그렇다면 달집을 태우는 강변에 마을의 수호와 안녕을 바라는 솟대를 수 십개 세우자, 집집 모든 대문에 입춘대길 글씨를 써 붙이자, 마을학교인 장흥남초등학교 아이들도 와서 불놀이를 하게 불깡통을 준비하자, 오며가며 만난 지역문화활동가들이 이구동성 즐거운 욕심을 부렸다.

 그런데 이러다가 마을사람들은 들러리로 뒤처지고 바깥 사람들이 설치게 되는건 아닐까 우려가 되었다.
하지만 보름날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바깥에서 온 사람들이 조심조심 마을집 대문에 입춘대길 글씨를 써 붙이는 동안 마을사람들은 벌써 바깥에서 온 상쇠와 함께 장단을 맞추더니 마을 당산나무 앞으로 나서며 지신밟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욱신욱신 밟아가는 마을길과 집집의 마당에서 마을사람들의 어깨춤이 어찌나 흥겹던지.

 마을사람들과 바깥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솟대를 세우고 달집을 만들어 달맞이를 준비한 강변으로 마침내 지신밟기를 끝낸 농악대가 출현했을 때 우리는 이미 마을 안과 밖의 경계를 넘어 하나로 출렁거리고 있었다. 달집을 태우며 소리꾼의 선창으로 모든 사람들이 손에 손을 잡고 강강수월래를 했을 때는 벌써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어이, 내년에는 우리가 배워서 지신밟기를 해불세.” 마을 동장님의 이야기 속에서 송산마을의 집단적 신명이 살아나고 있음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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