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 손바닥 소설 2] 에…메리카노
[이진 손바닥 소설 2] 에…메리카노
  • 이진 소설가(문학박사)
  • 승인 2019.06.12 20:38
  • 댓글 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거기 리모델링이 끝났대. 궁금하지 않아?”

우리의 유능한 피엘(part leader)님은 회사 근처 카페지도를 머리에 완벽하게 입력해 놓은 게 분명하다. 모두들 기대를 쏟아내며 그의 뒤를 따랐다.

슬그머니 몸을 돌려 뒤로 빠지려고 했다. 리모델링이란 게 결국은 가격 리모델링이 아니던가? 누군가가 와락 내 팔짱을 끼었다.

“난 말야, 느긋하게 쉴 수 있는 이 시간이 제일 좋아.”

나보다 2주 늦게 들어온 정아님이다. 나이가 같아서, 성별이 같아서, 단기 계약직이라는 처지가 비슷해서 등등의 이유로 말을 튼 게 화근이었다. 이런저런 핑계를 앞세워 ‘점심 후 카페 행’이라는 습관적 단체행동에서 종종 이탈하던 내 주체성에 금이 간 건.

난 혀끝에서 맴도는 말을 차마 내뱉지 못했다. ‘난 말야. 아까운 돈이 사라지는 이 시간이 젤로 싫어.’

ⓒ광주인 자료사진
ⓒ광주인 자료사진

애초에 하루 한 시간의 시급 한도 내에서 교통비와 점심 값을 쓸 계획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가격 저렴한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할 수 있었으므로 원래 계획보다는 조금 여유가 생기겠다 싶었다.

다음 학기 납부금은 충분히 해결 가능하리란 기대도 피어올랐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복병이 있었다. 단 하루라도 카페엘 가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피엘 성희님이 바로 내 직속상관이란 점이었다.

출근 첫날, 점심 식사를 함께 한 직원들은 누구랄 것 없이 당연스럽게 그를 따라 회사 근처의 한 카페로 옮겨갔다. 얼결에 뒤따라가는 동안 머릿속 계산기가 바쁘게 움직였다.

“뭘로 드실래요?”

주문 담당을 자처한 직원이 이런저런 주문을 받는 동안, 피엘 성희님이 내게 따로 물어 왔다. 눈가에 퍼지는 미소로 보나, 살가운 말투로 보나, 그의 질문 뒤에는 분명 ‘내가 한 잔 사줄게요.’라는 말이 숨어있는 듯 했다.

12주짜리 단기 계약직이긴 하지만 담당부서의 신입인 만큼 그 정도 호의는 베풀 생각인 것 같았다.

“아메리카노요!”

사실 아메리카노를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그중 가격이 저렴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카페를 가야 할 경우 주머니 부담을 덜기 위해 기계적으로 선택해 왔던 것이다.

직속상관이 쏜다는데 아포카토나 블루베리 쥬스 같은 좀 더 비싼 걸로 시켜도 괜찮았을 것을…, 하는 후회가 슬며시 따라붙었다. 하지만 커피 맛은 더할 나위 없이 달콤했다. 시럽을 한 방울도 첨가하지 않았음에도.

점심시간이 끝나기 5분 전, 한참 수다를 떨던 이들이 주섬주섬 일어서기 시작했다.

“각자 비용은 제게로 쏴 주세요.”

주문담당을 자처했던 직원의 목소리가 해맑게 울려 퍼졌다.

“참, 오늘 처음 오신 윤미님! 대화방에 초대할게요. 코코패이 하시죠? 바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네? 아…, 네!”

난 당연히 예외일 것이라 생각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피엘 성희님의 행방을 찾았다. 그는 스마트폰에 코를 박은 채 손가락을 튕기며 일어서는 중이었다.

“오우케이! 보내기 완료!”

나도, 나도, 두어 사람이 중얼거리며 그를 따라 일어서고, 누군가는 의자를 안으로 집어넣고, 누군가는 진즉에 해결해 두었다는 듯 하품을 하며 출입문을 향해 걸어가고….

순간 아메리카노를 시키길 정말 잘했다는 안도감이 몰려왔다. 여튼 그 이후로 난 그들과의 커피 타임에 되도록 끼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함께 하는 경우라면 그중 가장 저렴한 핫 아메리카노 스몰을 고수했다. 일주일에 두 잔 이내라면 애초의 내 계획에서 크게 빗나가지는 않을 것이었다.

정이님에게 이끌려 리모델링이 끝났다는 카페로 따라 들어갔다. 아메리카노가 얼마인지부터 살폈다. 그 한 잔의 값이 카페의 가격수준을 확인해주는 바로미터니 만큼. 그러면 그렇지. 내 예상은 완전히 적중했다. 이전보다 15%나 더 올랐다.

“우와! 분위기 좋다!”

“어머나! 이 꽃들 좀 봐!”

“창가 자리가 저기 밖에 없네. 의자를 좀 붙여달랄까?”

모두들 어쩌면 그렇게 초연한지…, 심각하게 고민이 되는 내가 딴 나라 사람인가?

“주문하세요. 뭘로들 드실래요?”

오늘의 주문담당은 정이님인 모양이다. 괜스레 들떠 내 팔을 잡아 끈 게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각자 주문하고 계산하는 번거로움은 줄이고 연말정산에서의 점수는 높이자는 취지로, 돌아가며 어느 한 사람에게 현금을 몰아주고, 그의 카드로 결제케 하는 방식은 사실 우리에겐 의미 없는 일이었다.

연말정산이고 뭐고 할 만큼의 소득 수준을 유지하는 정식 직장인이 아니었으므로. 여튼 주문을 재촉하는 정이님에게 호응을 해주긴 해야 할 텐데….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공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공

딱히 끌리는 게 없다며 뜨거운 물이나 한 잔 가져다 마실까? 하지만 어제 갔던 카페에서도도, 그저께 갔던 카페에서도 그랬다. 사흘 째 공짜 물만 들이켜면 다들 날 보는 눈이 삐딱해지겠지.

애꿎은 메뉴판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자니 뭔가가 눈에 확 들어왔다. 에스프레소. 꽤나 다정한 가격이었다. 아메리카노보다 더 싼 게 있었다니, 이걸 왜 몰랐을까?

늘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던, 오래 전에 헤어진 남자 친구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그 앤 잔째 삼켜버릴 듯 순식간에 커피를 털어 넣은 다음, 오만상을 찌푸리고선 생수 한 컵을 목구멍에 들이붓곤 했다.

‘사실 아메리카노는 미국인들의 커피 취향을 비하한데서 만들어진 말이야. 진한 에스프레소를 즐겨 마시는 유럽인들 눈에 잔뜩 물을 섞은 연한 커피를 사발로 들이붓는 미국인들이 얼마나 천박해 보였겠어?’

오만한 눈빛으로 나불대는 그 입술이 내 눈엔 천박해 보이기만 했는데…. 내가 늘 에스프레소를 없는 메뉴로 치워놨던 이유가, 그 애가 늘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던 이유가, 문득 깨달아졌다.

더 이상의 고민은 없다. 에…, 막 주문을 하려는 순간 정이님이 싱글거리며 속삭였다.

“오늘은 피엘님이 쏜댔어. 우리 파트가 최우수 등급을 받았다잖아!”

“에…메리카노!”

순간 혀가 꼬였다. 기껏 또 아메리카노라니! 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5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그사람 2019-06-14 09:42:44
에스프레소 한잔 쏠께요

러블리 2019-06-13 10:17:49
알바생의 서글픈 이야기~웃프다

이름이름 2019-06-12 21:54:12
주인공 심경이 이해가가요.. 카페 오래 앉아있을 것도 아니고 카누나 마셨으면..ㅎㅎ

Bins 2019-06-12 21:50:18
진짜 공감된다... 제발 가기 싫은데 카페 가서 돈 낭비하는 문화 사라졌으면

시루 2019-06-12 21:30:00
안타까운 이야기~~커피값 넘 비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