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집의 무등야설] 죽음까지 5.18과 함께한 고 서유진 선생
[김영집의 무등야설] 죽음까지 5.18과 함께한 고 서유진 선생
  • 김영집 광산구기업주치의센터장
  • 승인 2019.05.24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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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국제인권대사... 광주와 아시아가 안식처가 될 것
오는 6월 1일 오전 10시30분 옛 5․18묘역에서 안장식

오월은 눈물이 많은 달인데 슬픔 하나 더 얹는다.

볼티모어로부터 부고가 왔다. 5․18의 전도사로 불렸던 인권운동가 서유진 선생(78세)이 미국 시간으로 5월 16일 새벽 샤워를 마친 뒤 아침 소파에 누운 채 조용하게 운명했다는 소식이다.

인생은 미완성이라더니 내가 졌다

5월 7일 광주에서 올린 페이스북에는 ‘인생은 미완성이라더니 내가 졌다. 집으로 가자.’라고 쓰여 있다. 몸 상태를 본 주변 지인들이 모두 그 상태로 캄보디아행은 무리라고 했다는데 선생은 5월 10일 캄보디아로 갔던 것 같다.

프놈펜에 있는 ‘켑(거주했던 집)’으로 가서 집 정리를 하고 5월 13일 캄보디아 프놈펜을 출발하여 꽝조우, 뉴욕을 거쳐 부인이 사는 볼티모어 집까지 꽤 긴 마지막 여행을 하고 5월 14일 집에 도착했다.

고 서유진 선생.
고 서유진 선생. ⓒ김영집

그는 이미 광주 프놈펜을 떠나며 죽음을 예고하는 운명의 글을 남겼고 아마 볼티모어의 마지막 하루를 평생 고생을 시켰던 부인과 마을 산책을 하며 마지막 화해의 시간을 나눴을지 모르겠다.

‘이제 거기서 끝내라는 합창 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는 것 같기도 하지만 죽고 사는 문제는 분명 내 소관이 아니라는 걸 누구 못지않게 알아 버린 내가 할 말이 또 있겠는가?’(5.11 서유진 선생 페이스북) 죽음을 이미 짐작하면서 편안한 마지막을 고통 없이 맞이했던 것 같다.

고인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그런 정도의 편안한 운명은 보통의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상당한 내공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리라.

서유진 선생이 5․18을 목전에 두고 5월 16일 운명했는데 죽음조차도 5월과 함께 한 운동가가 아니었을까.

김대중 대통령후보 도우려 귀국

내가 선생을 만난 것은 1992년이었다. 미국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을 열렬히 전개하던 그가 92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대통령 후보를 돕기 위해 한국에 왔다고 했다.

작고한 문동환 목사 등과 미국 뉴욕 볼티모어에서 재미 민주화운동을 했으니 그때 정권교체 제대로 한번 해 보자는 생각이었던 같다.

그는 1992년 <볼티모어 선(The Baltimore Sun)>지 기자로 1980년 5․18 현장을 취재해 보도했던 한국통 언론인 브래들리 마틴(Bradley Martin)을 안내해 5․18 도청항쟁 대변인 윤상원 열사 취재 동행을 하고 있었다.

브래들리 마틴은 1997년 서 선생의 섭외로 광주시민연대모임이 간행한 <5․18특파원 리포트>에 ‘윤상원 그의 눈길에 담긴 체념과 죽음의 결단(Yun Sang Won : The Knowledge in Those Eyes. 정영목 번역)’이라는 글을 기고한 바 있다.

생전 서유진 선생.
생전 서유진 선생. ⓒ김대현

처음 만난 선생은 흰 새치 머리가 많이 나 있고, 금테 안경을 썼다. 영어가 유창했고 열정이 넘친 사람이었다.

전북 전주 삼례에서 1942년 4월에 태어나 명문이었던 전주고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에 입학했다가 중도에 그만 뒀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간 선생의 파란만장한 미국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 후 <죽음의 언덕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공동저자인 이재의씨와 더불어 셋이 자주 어울리며 이야기도 나누고 인터넷 동호 모임(21세기 프론티어)도 같이 하면서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때 그의 인터넷 아이디는 롸키(Rocky 행운을 바라는 의미도 있고, 미국 롸키산맥을 상징하기도 함)로 50대 장년이면서도 30~40대들과 온 오프라인에서 활발하게 소통했다.

재미민주화운동에 청춘 바쳐

지금까지도 그가 미국으로 건너간 청년기부터 긴 세월동안 미국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그는 미국에 망명한 김대중 대통령과 문동환, 한완상 등 그 주변 인사들, 그리고 미국에서 한국 민주화를 돕는 재미동포들의 조직에서 청년시절부터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온 것 같았다.

그는 미주 민주회복통일연합에서 활동하며 1980년대 초 5․18 광주 학살의 진상을 미국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고 김근태 선생이 고문 받고 민청련 민주투사들이 시련을 받았을 때 뉴옥에서 캠페인을 하고 모금을 하고 미국 언론에 진짜 뉴스를 전하기 위해 활동했던 이야기들을 했다.

특히 한국 민주화에 호의적인 에드워드 케네디, 바바라 미컬스 등 미국 의원들과 교류하면서 김대중과 민주화운동가들을 탄압했던 전두환 정권에 압력을 가했던 전설적인 활동들에 대해 종종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고 서유진 선생.
고 서유진 선생. ⓒ김영집

반면에 재미한인회 활동을 하며 돈을 벌고, 전두환 등 독재자들한테 굽신하다가 나중에 민주 쪽으로 몸을 바꾸어 한국에서 출세한 일부 정치인을 경멸했다.

그는 성격이 불같아서 누구에게도 아부하지 않았다. 잘 나갔던 전주고 동문 출세자들 옆에 가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들의 잘못된 정치활동에 그 누구보다 분개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던 것 같았다. 부인과 함께 일해 두 자녀를 키워야 하는데 자신이 이런 활동에 전력을 다하다 보니 결국 모든 가사부담이 부인에게 돌려졌다. 힘든 세탁소 일을  부인과 자녀들이 맡았으니 원망이 매우 컸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고인은 술이 많이 취했을 때 가끔  가족의 이야기를 절망에 빠진 채 털어 놓을 때가 있었다. 우리는 모두 그런 생활에 익숙한지라 그의 슬픔을 무심한 채로 들을 수밖에 없었으나 선생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실감나는 그의 영어에 여간 매료되었고(그는 영어 한다는 사람들이 책에 있는 영어만 하지 소통을 가능케하는 터미널로지가 언어를 모른다고 비판하곤 했다), 거기다 쉼 없이 계속되는 미국에서의 한국 민주화를 위한 활동 역사를 실감나게 들을 수 있었다.

내가 1995년에 전국연합과 통일관련 사건으로 감옥에 잠시 들어 가 있을 때 선생은 넬슨 만델라 남아공 대통령의 저서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Long Walk to Freedom)> 원서를 구해 광주교도소에 보내주었던 적도 있었다.

당시 영어를 검열할 수 없었던 교도관들은 한동안 도서 차입을 허락하지 않다 강력한 항의로 결국 허가해 준 기억이 생생하다.

광주시민연대모임과 5․18 국제화 사업 시작

고 서유진(왼쪽) 선생이 지난 2017년 8월 24일 당시 윤장현 광주광역시장을 만나 ‘5‧18특파원 리포트’ 출판 배경에 대해 대화하고 있다. ⓒ광주시청 제공
생전 서유진(왼쪽) 선생이 지난 2017년 8월 24일 당시 윤장현 광주광역시장을 만나 ‘5‧18특파원 리포트’ 출판 배경에 대해 대화하고 있다. ⓒ광주시청 제공

그 후 1996년 서 선생과 이재의씨 나, 셋은 윤장현 오수성 정찬용씨 등이 이끄는 '시민연대모임'이 벌린 5․18 정신의 국제적 계승사업의 일환으로 5․18 주간에 개최한 ‘인권과 평화를 위한 국제청년캠프’에서 5․18 국제적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선생은 해외 연락과 방법을 코칭했고, 이재의씨는 기획을 나는 전반적 사무를 총괄했다.

이 캠프는 당시 세계 16개국 청년들이 광주에서 일주일간의 캠프를 진행하면서 광주와 세계 특히 아직도 독재에 억압받고 있는 동남아, 서남아시아 국가들에게 광주 5․18 정신과 운동모델을 제공했다.

그 때 청년들과 달리 콩고출신의 유엔인권이었던 움바야 교수(나중에 콩고민주정부 법무장관?), 필리핀 민주화운동가로 아시아태평양평화군축회의 의장이었던 로물로페랄타씨 등이 선생과 함께 시니어 그룹으로 참여해 청년들을 격려했다.

이 캠프가 계기가 되어 시민연대모임은 1997년 5월 <5․18 특파원 리포트>를 간행했는데 선생은 그 때도 지인이었던 브래들리 마틴기자 그리고 뉴욕타임즈 서울주재기자였던 심재훈 기자와 연락해 5․18 당시 광주를 취재했던 외신특파원들을 찾아내 그 생생했던 기록을 모으는 데 도움을 주었다.

광주와 아시아 오가며 5․18 전도사 역할

고 서유진 선생. ⓒ서일권

1997년 이후 그는 시민연대모임을 도와 1998년 아시아인권지도자들을 광주에 불러 포럼 후 ‘아시아인권헌장 광주선언’을 채택하여 발표했다.

역사적 일을 본격적으로 돕던 그때 스리랑카 출신의 법조인이자 시인인 바실 페르난도씨가 위원장으로 있던 홍콩의 아시아인권위원회 위원장과 관계를 돈독히 쌓아 동서남 아시아권에 본격적으로 5․18을 홍보하는 전도사가 되어 광주항쟁의 성공모델을 수출하는 해외인권운동가로 변신한다.

그는 캄보디아, 미얀마, 인도네시아, 태국, 스리랑카 등에서 직접 아시아인권위원회 프로젝트를 담당하기도 했다.

또 광주를 비롯한 한국의 청년들이 아시아인권위를 매개로 인턴과 아시아 인권운동 체험활동을 수행하는데 연계 역할을 했다.

주로 광주를 베이스로 활동하던 그는 나중에 아예 캄보디아로 활동기지를 옮겨서 광주와 아시아를 오가며 활동을 했다.

민중화가 홍성담씨는 선생이 연계하여 스리랑카, 캄보디아, 동티모르에서 <5월판화전> 전시회를 했고, 뉴옥 퀸즈뮤지엄에서 전시회를 할때는 매일 미술관에서 5월판화를 관객들에게 설명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선생은 인권과 정의의 단순한 활동가가 아니라, 각 나라와 민족의 다양한 민속예술, 그리고 끈적끈적한 재즈와, 고스톱 화투판에서 남들 약 올리게 하는 문화적 재능이 특별했지요"라고 말한다.

홍 작가의 오월판화가 아시아 현대민중미술에 영향을 미치는데 선생의 땀방울이 베어 있었다.

윤장현 시민연대모임 대표(전 광주시장)의 지원을 받아 시민연대모임 5.18기념재단과 연계하여 광주 5․18의 세계화에 힘썼고 나중에 윤장현대표가 시장이 되었을 때는 광주 5․18 인권도시의 해외 특사와 같은 활동을 했었다.

물론 그는 죽을 때까지 미국 시민권자로 한국인 국적이 아니었고, 한국에서 관직을 받거나 봉급을 받았던 적이 없다.

고 서유진 선생.
고 서유진 선생. ⓒ이용빈

다만 친밀하게 지냈던 윤장현 전 광주시장, 김상윤 윤상원기념사업회 이사장, 나간채 전남대 전 교수 그리고 친한 고교 동문과 항상 돌봐 주었고, 전주에 사는 누님이 그의 생활을 돌보았을 뿐이다. 그 외에도 21세기 프론티어와 광주의 많은 후배들이 그와 함께 했다.

그래서 그는 거의 빈손으로 세상을 돌아다녔고 그래서 생활비도 적게 들고 질척거리는 인연이 없는 캄보디아 마을을 그의 거처로 삼았던 것이기도 했다. 나중엔 미국의 연금을 받아 활동하며 미국을 깐다고 너털웃음을 웃기도 했다.

<신좌파의 상상력>을 쓴 보스턴 엔트워스공과대 교수출신인 조지 카치아피카스가 그와 벗이 되었다. 조지 교수가 광주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세계의 민중혁명을 조사연구했는데 선생은 그와 비슷하게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광주 5․18혁명을 전도했으니 서로 죽이 맞았을 것이다.

조지 교수는 2015년에 <한국의 민중봉기> <아시아의 민중봉기>라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출판했는데 그 노작의 밑거름에 선생이 동행한 땀방울이 있었을 것이다.

광주인권상 첫 수상자 동티모르 구즈마오 의장 한국 불러온 5․18 특사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5․18기념재단이 처음으로 광주인권상을 제정하고 2000년 제1회 때 국제사면위원회, 아시아인권운동위원회, 동아시아평화·인권국제회의에 후보 추천을 의뢰해 동티모르 저항민족평의회(CNTR) 의장 사나나 알렉산더 구스마오(Xanana Alexander Gusmao)를 선정했다.

문제는 구스마오의장이 이 상을 수상할지, 수상을 하러 광주를 방문할 지가 현안이 된 적이 있다. 그때 선생이 동티모르에 파견되었다.

그는 명석한 판단으로 구스마오와 함께 동티모르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당시 호세 라모스 오르타 외무장관(동티모르 2대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자)을 만나 인권상의 취지를 설명해 결국 구스마오 의장이 수상을 수락하고 광주방문까지 오도록 하는 실력을 보여 주었다.

고 서유진 선생.
고 서유진 선생. ⓒ김영집

선생은 내게 PR(Public Relation)에 대해 소개를 자주 했다. 한국에서 PR하면 광고사업 정도라고 생각할 때 미국의 공공관계이론을 안내하며 책도 사주었던 것이다.

그는 PR로 사업을 하진 않았지만 모든 일을 할 때 PR 이론을 적극적으로 실행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운동가이면서 공공관계를 매우 잘하는 전략적인 사고를 가진 전문가였다.

그는 항상 강조했다. ‘네가 싸우는 전장터(Battle Ground)를 먼저 정의해라. 그리고 이길 수 있는지 판단하고 이기는 싸움을 벌여라’ 그가 한국의 지독하고 저급한 선거나 정치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해 현실에서 이런 이론은 잘 적용되지 않았지만 작고한 친구 김태홍 국회의원이나 여러 사람들에게 그는 이런 PR전략을 자문하기도 했다.

한국의 미래는 청년, ‘지식인 경멸’ ‘꼰대 증오’

아마 선생을 만나 본 사람들은 그의 직선적인 말과 열정에 놀랐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나이가 들어 흰머리가 풀풀 날리지만 한국의 이른바 ‘꼰대’들을 매우 증오했다.

그는 ‘이론만 달달 외우는 유학파 교수나 이론가’들을 경멸했고,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데도 천년만년 어른행세나 하며 자신의 자리와 권력만 유지하는 한국의 ‘정치 꼰대’ ‘사업 꼰대’들을 증오했다.

그리고 항상 청년들이 세상에 도전하고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곤 했다. 그래서 잘난 체하는 지도자들이나 기관장 대표들 모임에 가는 일이 적었고 선술집에서 젊은 청년들을 만나 토론하는 것을 즐겼다.

캄보디아에서는 세계에서 오는 청년들과 대화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광주시민단체협의회 박재만 대표, 전 광주시 인권평화협력관 김수아 변호사 서일권 대표 등 내가 다 알지 못하는 많은 젊은 세대들이 그에게서 배우고 지금 힘차게 성장해 가고 있다.

내가 32살 경에 그를 만났으니 그는 내가 너무 좋았을 것이고 상당히 희망을 갖는 대상이 되어 애정과 조언을 많이 주었다. 그런데 선생의 말년기에 나는 그와 별로 친하게 교류하지 못했다.

나는 그가 기대하는 대로 살지 못했고, 그가 싫어하는 정치인과 같이 활동을 하기도 했다. 나는 실패하기도 했고, 척박한 현실을 개척해 나가야 했다.

그의 강한 성격은 결국 나와 다소 간격을 두게 되고 나도 역시 부담스러웠다. 소식을 매번 듣지만 우리는 서로 따뜻한 교류를 나누지 못한 채 이제 영원히 이별을 하게 됐다. 그렇다고 오랜 우리의 우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리다.

볼티모어는 눕기에 너무 좁을 것...광주가 그의 명예를 빛내 주길

ⓒ김영집
동남아시아 민주화운동에 토론하는 생전 서유진 선생. ⓒ김영집

청년기 미국에서 해외민주화운동으로, 귀국하여 5․18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전도사로, 아시아의 여러 독재국가 인권탄압 국가에서 활동한 국제인권운동가로 선생의 파란 많은 일생은 끝이 났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볼티모어에서 눈을 감았지만 그러나 볼티모어는 선생이 눕기에는 너무 조용하기도 하고 좁을 것 같다.

그의 영혼은 광주나 아시아의 어느 곳에 쉬었으면 좋겠다. 나는 광주시와 5․18 광주가 선생의 명예를 빛나게 해 주길 제언하고 싶다.

그것이 그의 재능과 열정을 광주에 바친 노고에 대한 댓가라면 댓가일 수도 있겠다. 댓가라기 보다 존경과 영예를 가지고 뜻을 기리는 일이 될 것이다.

고인의 장례식은 5월 20일 미국 현지시간으로 저녁 7시 볼티모어 한사랑교회에서 미주워싱턴지역 호남향우회 주관으로 진행되었다. 광주에서는 고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5월 22일  5.18 구묘역 안장심의위 회의 결과 참석위원 만장일치로 안장이 결정되었다.

‘서유진 선생을 추모하는 사람들’은 6월 1일 오전 10시 30분 5․18 구묘역에서 안장식 및 추모행사를 하기로 했다.

아직 우리의 모든 현실은 그가 죽음의 순간까지 절규했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아직 그의 외침은 죽지 않고 우리 모두에게 메아리 친다.

지난해 5월 12일 광주 남구 양림동 오월어머니집에서 열린 제12회 오월어머니상 시상식. 왼쪽부터 윤장현 광주시장, 개인 수상자인 서유진 인권활동가. 장헌권 목사, 단체상 수상자인 이철수 목사(옛 전남도청 복원 대책위원장), 정현애 오월어머니집 관장. ⓒ광주시청 제공
지난해 5월 12일 광주 남구 양림동 오월어머니집에서 열린 제12회 오월어머니상 시상식. 왼쪽부터 윤장현 광주시장, 개인 수상자인 서유진 인권활동가. 장헌권 목사, 단체상 수상자인 이철수 목사(옛 전남도청 복원 대책위원장), 정현애 오월어머니집 관장. ⓒ광주시청 제공

풍운의 국제혁명가답게 회고록 하나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말은 그의 페이스북(Eugene Soh)에 생생하게 남아 있으며,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존재하고 있다.

쓸쓸하게 보낸 선생께 울컥거리는 미안한 마음을 전하며, 마지막으로 이렇게 부르고 싶다.

‘광주를 사랑하고 청년들에게 희망을 전했던 풍운의 5․18 인권혁명가 서유진 선생’ 아듀 롹키 우리의 형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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