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에 대한 보헤미안의 소고- 작가 허 진

작가를 만난 곳은 점심식사를 겸한 식당이었다. 한바탕 쏟아진 비의 뒤끝 때문이었을까, 꽃잎이 길 바닥에 눈처럼 깔려 있었다.

지역의 한 대학에 있는 그의 작업실은 교수연구실과 같이한 열악한 환경이었다. 본 작업실이 있는 곳은 서울이었고 연구실에서의 작업은 근근해 보였다. 연구실의 천장까지 중첩되어 있는 대작들과 이곳저곳에 세워져 있던 작업들은 수 일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았다.

어두운 먹 맛과 화지 안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듯이 둥둥 떠다니는 인간과 동물들의 군상 때문이었다.

꿈 길 같았다. 손으로 잡으려하면 더 멀리 달아나 버리는, 다시 다가와 손끝에 머무를 것 같은데 다시 다가가면 어느새 형태를 바꾸어버린 사람과 동물들이었다.

먼지처럼 부유하는 형상들 속에서 작가의 보헤미안이 중첩되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작가의 작업은 노마드(Nomad)였다.

나는 나를 증명한다.

허진 작가. ⓒ광주아트가이드
허진 작가. ⓒ광주아트가이드

작가는 이 지역, 호남 남종화의 대가인 소치 허 련 선생의 고조손이다. 더불어 남농 허 건 선생의 장손이다. 작가는 “유년시절 할아버지께서 그림 그리는 모습을 자주 보았지만 그림을 그릴 생각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림 그리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고 작가 역시 할아버지 옆에서 자주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그림을 전공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였다. 어렸을 때부터 늘 곁에 있던 그림이었는데 막상 전공을 하려 한 발을 내미니 어렵고도 험난한 길이었다.

작가는 “할아버지는 내가 화가가 되길 원하셨다. 어린 날부터 청소년기까지 자주 듣는 말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난 의사가 되고 싶었고 공부를 열심히 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그림이 가슴을 뚫고 들어왔고 전공을 회화로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가장 현대적인 회화를 전공했으면서 우리의 전통적 재료를 사용해 화면을 구성한다. 부유하는 형상들처럼 자유로운 사고와 조형으로 자신의 작업을 드러낸다.

현재를 살고 있으므로 현재에 대한 발언 역시 멈추지 않는다.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발을 허공에 딛고 부유하는 현대인들의 초상인 유목에 이르면 작가의 작업은 절정을 이룬다.

놓치지 않는 것이 있다. 천연의 생태와 그 안에서 자신의 전부를 내어두고 살아가는 동물들이 바로 그것이다. 더불어 말, 표범, 하이에나, 기린 등의 온갖 종류의 동물들과 검은 색으로 발을 땅에 딛지 못하는 인간의 형상과 함께한다.

인간과의 공간 공유와 함께하고 있는 동물을 화폭 안으로 가져옴으로서 작가가 주장하고 싶은 언어는 공동체 의식이다. 생태적 삶의 지향이야말로 작가의 지향점인 것이다.

그림이 나를 불렀다

허진- 유목동물+인간-문명 2016-25(동학혁명운동이야기1)130×162cm_한지에 수묵채색 및 아크릴_2016.
허진- 유목동물+인간-문명 2016-25(동학혁명운동이야기1)130×162cm_한지에 수묵채색 및 아크릴_2016.

소리가 채색으로 왔다. 청각장애이지만 살아가는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작업을 하면서 수 만 개의 점을 찍으면서 물감의 색들과 찍어진 점들로부터 와 와 와 소리를 듣는다.

여기는 붉은 색, 이곳은 푸른색의 점을 찍어줘. 아우성치며 펄럭이는 소리를 듣고 원하는 소리대로 색을 입혀간다.

소리는 보이지 않는다. ‘그림은 정신을 담아내는 도구’라는 남종화의 본질적 정신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남종화의 5대손이지만 독창적이고 독자적인 화풍으로 구성한다.

생명의 존중과 현대의 부조리, 부조리한 생태적 환경의 소리를 도구로 이용해 자신만의 목소리에 집중한다.

파격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 전의 남종화에서 보여준 안빈낙도나 실경과 진경산수는 보이지 않는다. 편안함의 장점인 여백도 없다. 작가는 “비어있음이 채워짐과 같은 의미로 소통되었듯이 채워짐 역시 비워짐으로 인식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어두운 채색으로 무거워 보이지만 생각의 시간을 충분히 주는 장점을 가졌다. 인간은 한껏 단순화된 선으로 표현되고 동물은 최대한 세밀하게 보여 진다. 무언가에 쫓기듯 달리는 형태만으로 존재하는 사람들, 그들은 현대 속에서 거꾸로 매달려있거나 주저앉아 있으면서도 여전히 바퀴를 굴려야 한다. 멈출 수 없는 욕망을 찾아가는 과정은 각각이지만 결국은 모두가 같은 모습으로 궁극 된다.

불확실한 현대인들의 불안한 삶,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유목의 삶, 그리고 사라져가고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생태적 동물들. 모두가 익명으로 일상에서 만나는 우리의 외로움들이다.


** 윗 글은 (광주아트가이드) 114호(2019년 5월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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