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돌아오지 못한 열사 청년 이철규'
대학 친구 조성국 시인이 열사 삶 정리

지난 1989년 조선대학교 재학 중 교지 『민주조선』에 「미제침략사」를 게재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다가 숨진 채 발견된 이철규 열사의 삶을 담아 낸 최초의 평전 『청년 이철규』(문학들 刊)가 출간됐다.

이철규열사추모사업회의 뜻을 모아 그와 『민주조선』을 함께 만든 조성국 시인이 대표 집필한 이 책은 한 사람의 운명이 시대사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고 굴절되는지를 보여준다.

최근 출판된 이철규 열사 평전 '청년 이철규' 표지그림. ⓒ문학들 제공
최근 출판된 이철규 열사 평전 '청년 이철규' 표지그림. ⓒ문학들 제공

이철규 열사는 1982년 조선대에 입학해 1985년 ‘반외세반독재투쟁위원회’를 결성해 활동하다가 국가보안법 등으로 구속됐다.

1987년 6·29조치 이후 가석방 되어 복적추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조선대 학원민주화운동을 주도하였고 이듬해 3학년 2학기에 복적했다.

1989년 1월 교지 <민주조선> 편집위원장을 맡아 교지에 게재한 논문으로 전남지역 공안합수부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현상 수배를 받았다.

그해 5월 3일 광주 제4수원지 청암교에서 광주북부경찰서 소속 형사들의 검문을 마지막으로 행방불명됐고, 5월 10일 제4수원지에서 참혹한 변사체로 발견됐다.

이후 타살 의혹을 제기하며 사인진상을 요구하는 178일간의 범국민적 투쟁을 진행한 끝에 민주국민장으로 장례를 거행하게 되었다.

열사의 죽음을 두고 지금까지 타살 의혹이 제기되고 있지만, 국가기관은 경찰을 피해 수원지 철조망을 넘어 도망치려다 미끄러져 익사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조사 불능’ 결정을 내렸으며 2004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격동의 1980년 광주

이철규 열사는 1964년 전라남도 장성에서 태어났다. 장성군 삼서면 서초등학교와 삼서중학교를 거쳐 1979년 광주금호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80년에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광주5·18민주화운동을 경험했고, 같은 해에 봉제 공장 여공으로 일하던 누나를 병으로 잃는다.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약 80%가 미싱사와 견습공으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이었다. 환풍기도 없는 먼지구덩이 작업장은 마치 닭장과도 같은 다락방을 연상시켰다.

그 속에서 쓰러진 누나는 제대로 치료조차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고등학생 시절에 겪은 이 두 가지 사건은 이철규 열사의 정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대학교 1·8항쟁 참여

1982년 조선대학교 공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한 이철규는 박철웅 총장을 상대로 학원 민주화운동을 벌이던 중, 1985년 11월 호남지역대학생연합 2차 집회를 앞두고 이재석, 김낙중, 명지원 등과 함께 조선대 총학생회장 양희승의 집에서 밤새워 토론하던 도중 경찰에 연행됐다.

“처음에는 무기력증에 빠진 듯이 보였어요. 그렇게 게걸스럽게 해치우던 사람이 갑자기 하루아침에 손발이 묶이고 말았으니 적응하기 쉽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철규는 이내 특유의 침착함을 찾아가더군요. 독서에 정진하면서 스스로 학습 체계를 세워나가던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면회 오는 사람들에게 자주 책을 부탁하곤 했었지요. 학생운동사, 혁명사, 무장투쟁사, 철학, 사회구성체 이론 등, 다양한 서적들을 탐독했어요.”

당시 광주교도소에서 중구금방 생활을 했던 김낙중 씨의 회고다. 이철규 열사는 교도소에서 역사적 틀을 조망하는 안목을 기르는 데 집중했다고 한다. 외부와 차단된 수감 생활이 오히려 이론적 토대를 세우는 학습의 기회가 된 셈이다.

그렇게 2년을 보내고 1987년 6월 항쟁 이후 이철규 열사는 이감되었던 대구교도소에서 가석방을 맞이한다.

이철규 열사는 누나가 희생된 노동현장에 헌신하여 투쟁할 것을 다짐했으나 조선대 후배로부터 학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해 달라는 연락을 거절하지 못하고 다시 학교로 복적하여 박철웅 총장 퇴진을 위한 투쟁에 동참한다.

1987년 9월 18일, 총장실 점거로 시작된 조선대 농성은 다음 해인 1988년 1월 8일 공권력이 투입되면서 113일이라는 대학사 초유의 장기농성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올해로 31주년을 맞이한 조선대학교 1·8항쟁이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열사, 청년 이철규

1·8항쟁이 끝난 후 조선대학교 민주화 장정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 갈 무렵 이철규는 농성동 화실 생활을 끝내고 학기 복학을 준비했다. 학술부 활동의 일환으로 애국학교를 운영하면서 반외세통일운동의 당위성을 후배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한반도에서 민주인권, 민족자주, 조국통일이 이루어지는 그날이 우리들 싸움의 끝입니다.”는 그의 말은 평소 가지고 있던 신념이 어떤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1989년 1월, 조선대학교 교지인 『민주조선』의 편집장을 맡게 된 그는 교지에 실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관련 내용을 문제 삼은 노태후 정권의 표적 수사 대상이 된다.

이는 문교부에서 관선이사를 교체하여 이돈명 총장을 해임시키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었다. 그해 4월 편집위원 전원이 수배당했고, 이철규 열사 또한 광주전남공안합수부의 수사를 피해 피신하게 된다.

그러나 1989년 5월 10일, 광주 시민들의 식수원인 제4수원지 상류에서 그는 충격적인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부모님조차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끔찍한 모습으로 발견된 익사체는 보통의 익사체와는 외양 자체가 달랐다. 오른쪽 어깨가 왼쪽 어깨에 비해 심하게 부어 있었고, 손등에서 긁히고 찍힌 상처가 발견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양 손목과 발목에서 띠 형태의 상처와 탈색 부위가 관찰되었다. 그러나 이철규 열사의 시신을 부검한 국과수는 단순 익사로 발표했다. 성난 민심이 하늘을 찔렀다. 3,000여 명의 의료인들은 삭발과 단식 농성으로 사건을 은폐하려는 정부의 만행에 항거했다.

당시 총장이었던 장진성의 회상에 따르면 “투쟁은 굉장했었습니다. 주말도 예외 없이 날마다 시위가 계속되었지요. 그렇게 학우를 잃은 조선대생들은 교내 민주로에서 출발해 전남대병원 앞에서 일반 시민들과 합류했습니다. 이철규의 죽음에 항거하는 시위대의 선두는 이미 전대병원에 도착했는데 후미는 아직 출발하지도 않았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었”다고 한다.

생전 이철규 열사.
생전 이철규 열사.

또한 “성난 민심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남녀 구분 없이 삭발을 했었습니다. 삭발을 할 때는 머리를 자르는 사람도, 가위를 든 사람도 모두 함께 울었습니다. 3,000명 시위 인원 중 2,500명이 삭발에 참가했”을 정도였으며, 그 모습이 꼭 “승려대회”를 방불케 했다고 한다.

이처럼 고문의 흔적이 역력했던 이철규 열사의 의문사 사진은 전국을 뒤흔들었다. 국회에서는 국정조사권까지 발동하여 단순실족사가 아님을 밝혀보고자 했으나 아무런 성과도 없이 단순 익사로 마침표를 찍고 말았다.

이철규 열사의 죽음을 다시 한 번 주목하게 만드는 평전 『청년 이철규』는 국민으로부터 부여 받은 권리를 부패한 이들에게 허용할 경우, 국가는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단순한 폭력기구로 변질하고 만다는 것을 우리에게 깨우쳐 준다.
 

 [저자소개]

조성국 시인은 전라도 광주 염주마을에서 태어났다. 이철규 열사와 함께 조선대 『민주조선』 창간, 편집위원이었다.

1990년 『창작과 비평』 봄호에 「수배일기」 외 6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2015년 『문학동네』 여름호에 「해일」 외 1편을 발표하며 동시도 쓰기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는 시집 『슬그머니』, 『둥근 진동』과 동시집 『구멍 집』 등이 있다.

[차례]

작가의 말_04

제1부 대지의 품, 안과 밖

대지의 아들 이철규

한동부락에서 보낸 유년기_11•장성군 삼서면 서초등학교, 삼서중학교 재학시절_16

세상을 향해 물었지만

광주금호고 진학_20 •5·18광주민중항쟁의 한 가운데에서_23 •봉제 공장 여공, 누나의 죽음_35

제2부 고지를 향해 함께 가자

전사로 거듭나서

조선대 입학_43 •우리는 하나, 변산반도 MT_49 •해프닝으로 끝난 개교기념일 시위_56 •학원자율화조치로 숨통이 열리다_66 •민주화자율추진위원회 활동_69 •총학생회부활추진위원회 활동_80

전사로 성장하여

반외세반독재투쟁위원회 활동_86 •구미유학생간첩단 사건_92

전사로 완성되다

학습의 장, 광주교도소_95 •만남의 장, 대구교도소_104

제3부 민족대학을 되찾아라

과녁에서 빗나간 조선대

조선대 설립배경_111 •수감기간중 조선대 학내 상황_114

조선대로 돌아오다

복적추진위원회 활동_130 •막무가내 복적 거부_132

민족대학을 되찾기 위한 대장정

점거농성이 시작되다_135 •전교생의 유급위기_138 •춥고, 배고프고…_140 •문교부가 나서다_143

조선대의 1·8항쟁

기습적인 진압작전_145 •어찌 죽음이 두려우랴_151•항전은 끝이 나고_154

새롭게 쓰는 역사

새로운 총장을 찾다_158 •새로운 역사를 정립하기 위하여_159

제4부 『민주조선』, 무엇이 문제인가

격랑의 정국

노태우 정권의 대북 인식 전환, 북한도 우리민족_165 •노태우 정권, 운동권과의 전면전_168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_172 •노태우 정권, 칼자루를 쥐다_173

북한바로알리기 운동

조선대는 눈엣가시_177 •북한바로알리기운동에 앞장 선 학생운동권_179

『민주조선』 탄생

북한바로알리기운동 동참_181•『민주조선』이 탄생하다_182

『민주조선』 압수

괜찮아, 염려하지 마_184 •수배가 시작되다_186 •뜨거운 검거 열풍_189 •시작된 수사_192 •수상한 수사_196

제5부 의문사

변사체로 발견되다

참혹한 만남_201 •광주·전남 지역 보건의료인 공동대책위원회의 보고서_203 •성난 민심은 하늘을 찌르건만_207 •상이한 부검 결과_210 •살인자(murderer)를 언급한 미국 국무부 논평_211 •제보를 기다리며_213

이철규 열사는 떠나고

계획된 검문_216 •사인 규명 불능 판정_217

에필로그

국가 권력의 주인은 누구인가_221 •통일을 꿈꾸며_229•소년 이철규와 열사 이철규_233 •남은 자의 빚_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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