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제2장>

①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
②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是以 聖人

③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④ 萬物作焉 而不辭
⑤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弗居
   夫唯弗居 是以不去

[전문 번역]
세상사람 모두 알고 있는 아름다움이라도 아름다움을 꾸민거라면 이것은 악일뿐이다.
(천하가) 모두 알고 있는 선(행)이 선(행)을 꾸민거라면 이것은 불선일 뿐이다.

그러므로 (세상은)있음과 없음이 (교통하며) 서로 살고, 어려움과 쉬움이 함께 이루며,
길고 짧음도 서로 견주며, 높고 낮음 또한 서로 누워 있다.

또한 (악기의) 음률과 (사람의) 소리가 서로 어우러지고, 앞과 뒤가 (구별되어) 서로 이끌고 따르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성인은꾸밈없이 일을 처리했고, 말하지 않는 가르침을 行(행)하였다.

만물이 (뜻 없이) 지어졌을 것인가! 그래서 (만물이) 책망하지 않듯, (성인 또한) 살(아 갈)뿐 있으려 하지 않고, 베풀 뿐 (그것에) 의지하지 않으며 공이 이루어져도 (그것에) 머물지 않았도다.

대저 오로지 (이룬 공에) 머물지 않았음으로 이렇기 때문에 (그 공이) 없어지지 않았도다. {나의 해석서와는 ④ 그리고⑤번의 앞부분이 일부분 다르며, 기존서들과는 ①번을 비롯하여 전체적으로 다른 곳이 많다. 이미 앞에서 말했지만 이런 이유로 기존의 책 한권쯤은 같이 하기를 권한다.}

노자의 도덕경은 제1장부터 제3장까지가 노자철학의 서문이면서 핵심이자 요체다. 이후의 글은 세 개의 장을 구체화한 본론부분이다. 이 3장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하나를 선택하라면 볼 것도 없이 2장이다.

이 장은 노자의 도덕경이 철학서라기보다는 경전에 가까운지, 노자의 철학이 불교에 견줄 수 있는 진리인가에 대한 해답이 들어있는 곳이다. 그리고 노자성인이 적어도 부처님의 레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노자의 선언적 경구에서부터 마지막 단어까지 노자의 외침이 너무나 아름답게 녹아있는 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의 철학자들은 이장의 첫 문장부터 번역과 해석에서 중요한 오류를 범함으로서 이후 노자 도덕경을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중차대한 오류을 범하였다.

《說(설)》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세상사람 모두 알고 있는 아름다움이라도 아름다움을 꾸민 것이라면 이것은 惡(악)일 뿐이다. (또한 천하가) 모두 알고 있는 善(선)이라도 (이것이) 선을 꾸민 거라면 이것은 不善(불선)일 뿐이다.(세상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선행은 그것은 꾸미는 순간 이미 불선이니라.)

도덕경 제2장의 첫 문구다.
이 문장은 ‘하늘이 내려준 대로가 아닌 꾸민 것은 모두 나쁜 것’이라는 노자성인의 ‘선언문’이다. 그것을 아름다움(미)과 착함(선)을 들어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쉬워 보이는 이 문장도 다음과 같은 형태로 번역함으로써 앞서 이야기한 대로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너버리고 만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운 것인 줄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추한 것이다. 하늘 아래 사람들이 모두 선한 것이 선하다고만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선하지 않은 것이다.’

한문을 번역할 줄 몰랐을 때는 이런 문장이러니 했다. 그러나 지금, 위의 문장이 어떻게 이렇게 번역되는지 궁금할 뿐이다. 처음부터 ‘도덕경은 秘書(비서)라 문법 같은 것으로는 볼 수 없는 책이다’라고 선언하지 않았다면 글로는 이런 번역이 될 수 없다. 독자를 위해 내 나름대로 도식을 해보면, [天下(세상 사람들이1) 皆(다2) 知(알고 있다5) 美之(아름다움을3) 爲美(아름다운 것인 줄4)]가 될 것이다.

이는 한문문법으로도 맞지 않고 도덕경의 중요한 핵심어인 ‘無爲自然(무위자연)’의 ‘爲’도 번역이 되어져 있지 않다. 뒤에 ‘처무위지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여기의 爲(위)는 어떤 식으로든 ‘뜻’을 나타내야 한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요 선한 것은 선한 것이거늘 아름다운 것을 추하다고 하고 선한 것을 선하지 않다는 번역이 이상하지도 않았을까?

(※ 나의 글은 이처럼 문장 속에서 뜻을 찾는다. 이는 전 편에 적용된다.)

나의 번역을 도식해 본다.
[天下(천하가)皆(다,모두)知(아는)문장 전체가 주어인 美를 꾸민다]美(아름다움,주어)之(주격조사)爲(꾸민거라면)美(아름다움을), 斯(이것은)惡(나쁜 것일)已(뿐이다, 강조의 어미)

나와 기존의 번역은 두 가지 관점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첫째,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를 위와 같이 번역하여 노자는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라고 말하고 있다라고 설명한다.

둘째, 爲(위)를 번역 또는 해석함에 있어 ‘꾸미다’ ‘치장하다’ 등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하다(行)’로 이해하였다는 사실이다.(물론 이 문장의 번역 상으로는 행위로의 ‘하다’는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無爲를 ‘행위하지 않음’ 또는 ‘행위가 없는 것’으로 번역함으로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란 뜻의 무행(無行)의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물론 이러면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식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해석에서는 無行을 ‘무조건 아무 것도 않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해석가 마다 약간의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도올은 무위를 영어로 actionless라 표현하였고 오강남은 ‘행위가 없음’이라 하면서 non-action이라고 표현했다.)

첫 번째 문제는 지금까지의 해석서들처럼 이 글이 상대적인 세계관을 나타내고 노자는 그것을 부정(斯惡已)하기 위한 뜻으로 이 문구를 썼는가의 문제다. 이 장은 여기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 하자.(※문장마다 세세한 비교는 불가능해 보인다. 각 장마다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로 풀어가려한다.)

1. 노태준: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미를 미라고 인식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악이 존재하며, 또 모든 사람들이 선을 선이라고 인식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불선이 존재한다. … 이 상대의 세계에서 사는 한 모든 것이 대립하는 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대립상 중에 살고 그 대립상만을 보고있는 한, 참이라는 것은 이것을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상대의 세계에 산다는 것은 무가치한 일이므로, 성인은 무위의 세계에 몸을 두고 가르침을 베풀 경우에도 말로 나타내지 않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이다.(노자 도덕경,P35)

2. 도올 : 노자는 말한다. “천하의 사람들이 아름다움(美)의 아름다움됨(爲美)만을 안다(知). 그런데 그 아름다움이 추함(惡)일 수 있는 것이다.” 최소한 기원전 4․5세기 이전에 이러한 철학적 주제가 이미 충분히 논의되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노자와 21세기 上,P121)

3. 박일봉:미추(美醜)와 선악(善惡)의 관념이란 상대적인 것이다. 그 보는 관점에 따라 추함이 도리어 아름다움이 될 수도 있고, 악함이 도리어 선함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노자와 같이 자연의 경지에 높이 앉아 넓은 시야로 내려다 볼 때, 어디에 미․추와 선․악의 구별이 있으랴! (노자 도덕경,P18)

4. 이경숙: (상대적이라는 뜻은 다음 ‘고 유무상생~전후상수’를 풀이한 곳에서 짐작할 수 있다.)
어떠냐?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한 거 같지 않나? 맞다. 제대로 하긴 했다. … 그러나 이 문장이야말로 이 대목에서 꼭 필요한 내용이며, 노자가 왜 위미(爲美)와 위선(爲善)을 악(惡)과 불선(不善)으로 기피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는 대목인 거야.

노자가 여기서 하고있는 말을 정리해 줄게. … 어려움이 있어야 쉬움을 알 수 있고,…높은 것이 있어야 낮음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이것을 미(美)와 선(善)에 소급해서 말하면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꾸며놓고 천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으로 믿게 만들면 진짜 아름다운 것이 드러날 수가 없고…(노자를 웃긴 남자.P44,45)

(※1,2,3은 상대성을 부정하고 전일성으로 가라는 글로 해석하는 것이고, 4는 ‘꾸미다’로 번역을 하였으나 ‘꾸미지 말라’는 것을 ‘진짜 아름다운 것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란 뜻으로 잘 못 해석해버린 경우다.)

이 문장은 노자 도덕경 5천자의 내용을 결정하는 이정표가 되는 까닭에 좀 많이 인용했다. 그 문장이 선언적이다 보니 2천5백 년 동안 잘못 이해되어지고 영원히 도덕경을 ‘상대론의 초월’쯤으로 이해하게끔 만든 문장이기 때문이다. (※혹시 최근에 다른 뜻으로 해석한 책이 나왔는지는 모른다.)

‘모든 현상은 상대적이다’라는 것은, ‘상대적인 인간들은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알고 있지만 노자와 같은 철인이 볼 때에는 이것은 추함을 전제로 하고 있는 말이기 때문에 사실은 악한 것(사악이)이다’라는 것이다.
즉, 절대자의 입장에서 세상은 구별이 있지 않다. 그래서 노자는 ‘아름다움도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존은 이 문장이 2분법적 사고(상대적 사고)를 없애고 도와 하나 되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이 부분은 번역이 이미 틀렸음으로 다툼의 여지는 없다. 굳이 설명을 더하면, 아름다움이 추한 것이 아니라 ‘꾸민 아름다움이 나쁜 것이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면 2분법적인 사고가 될 수 없다. 사람이 보는 현상을 부정하는 것(아름다운 것은 사실 추한 것이다)이 아니라 본바탕이 아닌 꾸민 것(아름다움이나 선을 꾸민 것)을 부정하는 글이 됨과 동시에 현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현상을 인정하고 상대적(?)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그럼 노자가 왜 꾸미지 말라 했을까? 위 이경숙의 ‘해석’처럼 꾸미면 선악 미추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상대적인 것을 알 수 없다)에 노자 성인은 꾸미지 말라고 했을까?

꾸미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모두가 있는 그대로 드러날 것이다.
그럼 어찌되나? 서로 다름으로 해서 비교가 되어 질 것이다. 아름다운 년도 기준을 부여해 순서를 매길 수 있을 것이고, 추한 년도 순서를 매겨 추한 정도를 정할 수 있을 것이다. 힘이 쎈 놈도 기준을 부여해 순서를 매길 수 있을 것이고 힘이 약한 놈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이렇게 보는 것은 상대론적 입장이며 그 동안 모두가 해석한 방향이다.)

꾸미지 말라는 것은 또 한가지의 설명을 가능하게 한다. 높은 산도 있고 낮은 산도 있고, 뾰족한 돌산도 있고 울창한 나무가 우거진 산도 있고, 발이 짧은 놈도 있고 발이 긴 놈도 있다. 곰보도 있고 째보도 있고 얼간이도 있고 미스 코리아도 있고 미스터 코리아도 있고 얼굴이 길다란 사람도 있고 얼굴이 둥근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것들을 꾸며 구분이 불가능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알 수 가 없다. 볼 수가 없다. 이 놈이 그놈인지 그 산이 저 산인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본 모습을 볼 수 없어 꾸미지 말라는 것이다. 그럼 이의 해설처럼 ‘예쁘고 미운 년이 구분되는데?’라고 여러분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바로 여기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천지지시’며 ‘만물지모’인 ‘도’가 세상만물을 그냥 아무렇게나 만들어 놓았을까? 그랬을까? … 바로 그것이다. 모두가 意味體(의미체)라는 것이다. 그 자체로서 어머님의 의미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성인은 꾸밀 필요가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꾸미면 미추를 구분할 수 없어 꾸미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만물상의 아름다움 즉, 만물에 대한 固有性(고유성)의 선언이자 만물의 尊貴性(존귀성)의 一聲인 것이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타남으로서 세상은 만물상(萬物相)의 고유성이 있다. 그 모습이 아름답다거나 추한 것은 인간 인식의 문제다. 물론 고유성은 그 자체가 아름다움을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예시문이 다음에 이어지는 글(故 有無相生 以下)이다. 그러므로 故 有無相生에서 前後相隨까지의 문장도 많은 해석들처럼 상대론적인 비교문으로 번역이나 해석을 해서는 안 된다. 각각의 고유성으로 나타나는 자연스런 만물상의 다양성과 조화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아름다움이나 추함은 판단의 문제다. 노자는 이 글에서 판단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구분을 이야기하고 있다. 만물의 고유성(固有性)을 선언한 문장인 것이다. 즉, 만물은 본질(도)의 DNA를 갖고 태어난 소중한 당신이다. 그처럼 소중한 자식이기에 이름 없는 풀일지라도 노자에게는 존재가치가 있는 의미체(意味體)였다.

그렇게 소중한 당신이 꾸며서 본질을 알 수 없다면 어머니는 얼마나 황당할까? 노자는 그래서 꾸미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머니(도)에게는 만물(자식) 하나 하나가 모두 소중한 당신이니 꾸미지 말고 살다 가라고…. 요 말을 하기 위해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라 했거늘….

모든 존재들의 서열을 매기고자 꾸미지 말라는 뜻으로 어떻게 도덕경을 생각할 수 있을까? 내가 알기로 불교가 위대한 종교로 남을 수 있었던 건 만물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는 거다. 기독교가 종교로 세상에 남아있을 수 있는 건 절대적인 신을 두었다고는 하지만 보편적 사랑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천하 만물은 당연히 차이가 있다. 그래서 흘러가는 거다. 그걸 聖人이 부정했겠는가? 다만, 그 차이를 보는 관점이 다른 거다. 즉, 노자는 만물의 차이를 그것의 ‘존재의미’라고 생각한 거다. 소중한 당신인 이유 말이야.

[ 구분(차이)  = 고유성 = 개별성 = 존귀성(존엄성과 고귀함) = 존재의 의미 ]

이러니 꾸밀 이유가 있겠는가? 적어도 노자에게는 꾸미는 것은 자기를 죽이는 것이다. 더욱이 본질이 만든 작품 중에서 최고의 걸작인 인간이라면 어떠하겠는가? 말할 필요도 없다. 혹여 다칠세라 愛之重之(애지중지)하여 보고만 있어도 배불렀을 것이다. 그 생명 존중의 사상이 얼마나 처절한지 문장하나 하나에 묻어 나온다. 내가 아는 한 생명존중의 철학으로 이보다 더한 것은 보지 못했다.

두 번째 오류는 도덕경 전체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연유한다고 생각된다. 무위도식(無爲徒食)처럼 無爲를 無行으로 보는 것이 그렇게 틀릴 것만도 아니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맥이 이어지는 뜻은 無爲가 ‘하늘이 주어진 대로’라는 뜻의 ‘꾸밈이 없는’으로 해석될 때다.(근본 뜻에서는 말 할 것도 없다. 그래서 無行은 틀리다.)

아무튼 위와 같이 바르게 해석되어져야할 2가지의 중요한 뜻이 없어져버려짐으로서 이 후의 문장해석이 틀어져 버린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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