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기록관, 관련 자료 등 근거로 '편의조' 실체 접근
광주 출신 홍아무개 보안사 대령이 아지트서 지휘
전두환 지시로 광주 파견... 편의대 실체 진실 밝혀야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계엄군이 비밀공작팀 '편의대'를 운용하여 시민과 시위대를 이간질하고 각종 증거를 수집한 것으로 드러났다.

‘편의대’란 군인들이 평상복 차림으로 위장하여 주민들과 같이 행동하면서 첩보, 정보수집과 선무 선동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임시특별부대를 말한다.

14일 5.18광주민주화운동기록관은 "1980년 5월 당시 전두환과 그의 보안사는 공수부대의 총칼보다 더 악랄하고 간교하게 ‘5ㆍ18 편의대’를 운용했다"며 "보안사와 중정의 경우 요원 상당수를 광주로 내려 보내 ‘출장 선무공작’을 하도록 했다"고 관련 자료를 공개했다.

1980년 5월27일 5.18최후항쟁지였던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에게 진압 당한 시민군이 체포돼 이송되고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1980년 5월27일 5.18최후항쟁지였던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에게 진압 당한 시민군이 체포돼 이송되고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신군부가 '편의대'를 운용한 목적은 전두환그룹(신군부)의 정권찬탈 마지막 단계에서 광주가 최대 걸림돌로 솟아올랐기 때문에 이를 봉쇄 고립시켜 민중항쟁을 조기에 진압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5.18기록관 관계자는 "편의대의 임무는 광주시민을 ‘폭도’로, 광주를 ‘폭동의 도시’로 만드는(공작) 것이었다"며 "결국 이 공작은 성공했고, ‘폭동’을 구실 삼아 ‘광주’를 학살한 전두환은 5‧18이 끝난 후 1980년 9월1일 ‘대통령’을 탈취했다. 편의대가 성공하지 못했다면 전두환의 승리도 없었을 것이다. 편의대의 성공이 곧 전두환의 승리였다는 말"이라고 편의대의 역할을 분석했다.

이날 5.18기록관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전두환과 보안사는 광주일고와 육사 출신인 홍아무개 1군단 보안부대장(대령)을 중심으로 최아무개 보안사 기획실장, 최아무개 보안사 감찰실장, 박아무개 중정 과장 등 4명을 광주에 파견했으며 홍 과장은 당시 광주 사동 자신의 친척집에 현장 지휘소를 마련하고 중정과 경찰, 보안사 편의대를 지휘했다"는 것.

당시 '대공 분야 국내 1인자'로 불리던 홍 대령에 대해 당시 505보안대 대공과 수사관 허아무개  상사는 "홍 대령과 전두환과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팩트 중 하나는 10‧26사건 때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노태우 9사단장한테 10‧26을 알리는 서신을 그가 직접 전달했다는 것"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지난 11일 전두환씨가 광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은 후 자신의 차량에 탑승하기 위해 법원을 나서고 있다. ⓒ광주인
지난 11일 전두환씨가 광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은 후 자신의 차량에 탑승하기 위해 법원을 나서고 있다. ⓒ광주인

홍 대령은 1980년 5월19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부터 광주 파견 명령을 받고 보안사 대원 17명을 대동하고 5월20일(전두환은 검찰조사에서 5월19일이라고 진술) 오전 8시께 광주에 도착했다.

홍 대령이 당시 광주 현지 ‘막후공작 기획 총책’ 겸 ‘편의대 운용 총책’을 맡아 광주 시내로 잠입, 정보수집 및 특수활동을 벌였다. 

홍 대령이 남긴 보고에도 "광주시 사동의 친척 집에 비밀아지트를 설치하고 전남도경찰국(약칭 전남도경) 정보과 소속 경찰과 505보안대 정보과 요원의 지원을 받으며 광주 시내에서 활동 중인 정보조를 통합지휘했다”고 밝히고 있다. 

홍 대령은 경찰의 정보기능을 통합해 3개조의 ‘정보조’를 지휘했으며 5월 24일에는 광주 시내를 빠져나가 송정리비행장에서 대기하다 5월 27일 상무충정작전(광주 재진압작전)이 끝난 뒤 전남도경을 지휘ㆍ감독한 뒤 6월 초순께(1995년 7월18일 ‘5‧18 관련 사건 검찰수사결과’는 ‘6월8일’이라고 밝히고 있음) 상경했다.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전남도청 앞 광장(현 5.18민주광장)에서 열린 시민궐기대회. ⓒ5.18기념재단 제공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전남도청 앞 광장(현 5.18민주광장)에서 열린 시민궐기대회. ⓒ5.18기념재단 제공

이후 홍 대령은 6월10일께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정도영 보안처장 앞에서 5‧18에 대한 종합보고서(광주 상황을 정리‧분석한 것)를 설명한 것으로 밝혀졌다. 홍 대령의 활동 사실은 2007년 5.18진상규명위원회 조사보고서와 1995년 7월18일 검찰 수사기록에 남아있다.

홍 대령의 행적은 1995년 검찰 수사에서 ‘5‧18 관련 사건 검찰수사결과’(1995년 7월18일) 77쪽의 홍성률에 대한 기록에서 드러난다.

당시 검찰 조사에서 홍 대령은 “5월20일 오전 8시경 광주에 도착한 홍 대령은 아침 9시30분경 광주 시내로 들어가 직접 상황을 파악하고, 21일 이후에는 시내에 은신하면서 시위대의 위치, 무장 상황, 이동 및 공격 상황, 시민들과 수습대책위원회 동정 등을 파악, 보고하였고, 24일 오후 2시경부터 광주지구 보안부대(505보안대)로 귀대하여 지원업무를 계속하다가 6월8일 보안사로 복귀했다”고 진술했다. 

특히 홍 대령은 자신과 함께 광주에 온 보안사 요원 17명과 함께 편의대 운용하면서 "광주출신으로 현장정보를 수집하여 보고함과 동시에 시민과 시위대와의 분리공작을 추진했다”는 것.

따라서 5.18기록관 관계자는 "홍 대령 관련 기록과 검찰조사, 증언 등으로 보아, 홍성률을 광주 현지 ‘막후공작 기획 총책’ 겸 ‘편의대 운용 총책’으로 지목할 수 있다"고 밝혔다.

홍 대령이 운용한 편의대 구성에 대해 5.18 기록관은 "505보안대 장교 및 병사와 7ㆍ11ㆍ3공수여단 파견 보안대원 및 심리전 요원, 20사단 정보 장교 및 병사, 정보사령부 장교 및 병사, 전교사(예하 보병학교 등 각 학교 포함) 정보 장교 및 병사, 31사단 정보 장교 및 병사, 중정 전남지부 요원, 경찰 정보팀 등으로 구성했다"고 밝혔다.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희생자를 안장하기 위해 광주 북구 운정동 옛 망월동묘역(현 민족민주열사묘역)으로 옮긴 희생자 관 주변으로 유족인 어린아이가 서성이고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희생자를 안장하기 위해 광주 북구 운정동 옛 망월동묘역(현 민족민주열사묘역)으로 옮긴 희생자 관 주변으로 유족인 어린이가 상복을 입고 관 주변에 서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당시 ‘5‧18 편의대’는 시위현장에 잠입, ‘홍성률의 편의대 운영 기획팀’이 생산한 각종 공작 아이템을 실행에 옮기는 ‘행동부대’였다.

당시 경찰도 5월18~21일까지는 12개 경찰중대로 계엄군의 작전을 지원했으며, 시내 주요 지점에 정보센터 23개소를 운영하며 시위 진행사항을 파악했다. 또 주동자 색출 및 체포, 시위대의 위치, 무장 상황 파, 광주 시민 및 수습대책위원회 동향 파악, 사진병을 편의대로 투입해 ‘폭도’ 또는 ‘폭동화’ 공작 위한 시위 장면 선택적 촬영하고 시위대에 대해 모략 및 교란 등 이간질을 했다.

따라서 당시 이른바 '독침설' 배후와 실행도 '편의대'로 지목되는 가운데 5.18기록관 관계자는 "5.18진상규명위원회가 하루빨리 구성돼 ‘5‧18 편의대’ 운영 배후와 조직적 흐름 그리고 규모 등에 대해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밝혔다.  

저작권자 © 광주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