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정오 담양 평화의 소녀상 마당에서 각계각층 100여명 추모
1944년 봄 마을 뒷산에서 성노예로 끌려가 94세로 지난 2일 별세

곽예남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할머니의 추모제가 4일 정오 전남 담양군 담양읍 평화의 소녀상 마당에서 엄수됐다.

추모제는 담양군민, 광주전남 시민사회단체와 각 지역 평화의소녀상 건립위원회, 여성단체, 광주나비 회원 등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고인의 화장한 유해가 전주 승화원에서 화장을 마치고 담양 대덕면 장산리 안양골 고향마을을 들러 담양 평화의 소녀상 마당에 도착하면서 시작됐다. 

고 곽예남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할머니의 추모제가 4일 정오 전남 담양읍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열리고 있다. ⓒ광주인
고 곽예남 할머니의 영정이 담양 평화의 소녀상 옆에 놓여 있다. ⓒ광주인

김승애 담양 평화의소녀상 회원의 사회로 진행된 추모제에서 장석웅 전남도교육감은 조사에“오늘 같은 봄날 산에서 나물을 캐던 10대의 소녀가 일본군에 끌려가 위안부가 됐다”며 “마음이 신산하여 고인의 한 맺힌 인생을 어떻게 필설로 형용하겠느냐. 우리 모두 생활 속에 스며든 친일을, 정치 경제 문화 곳곳에 묻어 있는 친일의 찌꺼기를 털어내고 역사의 정의를 세우자”고 고인의 영면을 바랐다.

백희정 광주나비 대표도 “지난 2월 4일 만남이 마지막이 될 줄을 몰랐다. 분홍색을 좋아하고 항상 소녀 같았던 할머니셨다”며 “곽예남 할머니와 함께 했던 광주시청 앞 수요시위가 벌써 20회째를 맞고 있다. 할머니는 학생들과 우리들에게 살아있는 역사교육 그 자체였다”고 눈물로 고인의  삶을 추모했다.

이어 황정란 구례평화의 소녀상 회원과 박웅두 곡성 평화의소녀상 대표도 “아직 해결되지 못한 식민잔재를 청산하고 성노예제 피해에 대한 진정한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받아 내지 못한 체 보내 드리게 돼 가슴 아프고 부끄럽다”며 “강한 생명력으로 살아내신 고인의 삶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장석웅 전남도교육감이 고 곽예남 할머니 추모제에서 고인의 명복을 비는 조사를 하고 있다. ⓒ광주인
백희정 광주나비 대표가 고인을 추모하는 조사를 하고 있다. ⓒ광주인

최형식 담양군수는 “60년만인 지난 2004년 꿈에도 그리던 고국 고향 담양으로 돌아오셨지만 안타깝게도 95세라는 나이와 병환은 평온한 삶과 거리가 멀었다”며 “곽예남 할머니이 죽음은 한국 현대사의 비국이자 질곡을 증언하던 한 분이 떠나 것”이라고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이어 오은미 전북 순청 평화의 소녀상 회원의 추모가와 한순화 담양 평화의소녀상 회원의 진혼굿, 참석자 헌화와 조현옥 시인의 조시 낭송 등을 끝으로 고인은 고향 담양과 영원히 이별했다.

고인의 운구는 천안 망향의 동산으로 이동하여 영면했다.

고 곽에남 할머니는 1925년 전남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안양골에서 2남4녀 중 3녀로 태어나 19세 되던 해인 1944년 봄 일본군 성노예제로 끌려가 중국 등지에서 모진 고초를 당했다.

최형식 담양군수가 추모제에서 헌화하고 있다. ⓒ광주인
고 곽예남 할머니의 화장한 유해가 담양 평화의 소녀상 앞 추모제를 마치고 찬안 망향의 동산으로 떠나고 있다. ⓒ광주인
고인의 유해를 실은 장례차량이 영면할 천안 망향의동산으로 떠나자 최형식 담양군수와 시민사회인사들이 마지막으로 배웅하고 있다. ⓒ광주인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조선 국적으로 중국 곳곳을 떠돌다가 안휘성 숙주에서 60여간을 지내가 지난 2004년 MBC <느낌표> 프로그램에 극적으로 발견돼 2004년 고향 담양으로 돌아왔다.

고인의 지난 2016년 폐암 말기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후 3년째 투병생활을 해오다 지난 2일 향년 94세로 별세했다.

저작권자 © 광주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