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전남에 두 분의 생존자가 이제 모두 세상을 떠나셨다.

2016년 5월 17일 공정엽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가 향년 94세로 세상을 뜨신지 3년도 채 안되었다.

공정엽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가 해남 중앙 병원 중환자실에서 이승의 끈을 놓으려 하실제 속죄의 마음으로 면회를 갔었다.

지난 2일 별세한 곽예남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할머니 빈소. ⓒ광주인
지난 2일 별세한 곽예남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할머니 빈소. ⓒ광주인

이미 할머니는 혼수 상태여서 대화는 불가능 했고 몇 개 남은 썩은 이빨이 할머니가 힘 없이 벌린 입술 사이로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과 갈라진 손은 그간의 삶이 녹록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수액과 링거액의 투약에 의존한 체 풍선 처럼 부어있는 공점엽 할머니의 팔 다리는 숱한 바늘 자욱으로 피멍이 가득했었다.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그리고 이틀 후 운명을 달리하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다시 해남 중앙 병원으로 여성단체 대표였던 조영임씨와 해가 질무렵 광주 천변로에서 만나 해남을 향했다. 밤 늦은 시간의 조문 이였다.

해남은 사회 단체들이 단합이되서 장례식 준비를 잘하고 있었다. 장례식장은 사람들로 붐볐다.

담양의 곽예남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는 광주 나비 소모임 대표를 맡고 있을 때 몇 번 찿아 뵈었다. 할머니가 환하게 웃으시는 모습은 소녀 같았다.

내 손을 잡아주시면 손이 따뜻하다고 놀래시며 가끔 못알아 듣는 중국 말을 하셨다.

자주자주 찿아뵈었으면 더 오래 버티실 수도 있었을 텐데 이런 저런 핑계로 저간의 안부를 드리지 못한게 마음의 짐으로 남았다.

3일 오후 광주나비 회원들이 고 곽예남 할머니 빈소가 마련된 전주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하고 있다. ⓒ광주인
3일 오후 광주나비 회원들이 고 곽예남 할머니 빈소가 마련된 전주병원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하고 있다. ⓒ광주인

나의 시집 "일본군 위안부의 눈물"이 나오자 마자 광주 전남의 일본군 위안부 마지막 생존자 이셨던 담양의 곽예남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를 맨 먼저 찿아뵙고 시를 한 편 낭송해 드렸다. 

그랬더니 내 마음에 짐이 조금 덜어진듯 일본군인들에게 원수를 갚은듯 후련하기도 했었다.

오랜 중국 생활로 할머니는 고국어를 잘못하셨다. 가끔 "엄마 보고 싶어요."라는 말씀을 기적 처럼 하신다고 곽예남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곁을 늘 지키신 이관로 선생이 "엄마 보러 간다고 짐을 싸시면 한참 동안 고집을 부리신다"고 그 말이 나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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