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산작가의 포토에세이-섬 이야기 2

1871년 고종 8년 칠산(전라남도 영광군의 임자도, 송이도에서 전라북도 부안군의 위도에 이르는 서해바다를 말한다) 앞바다에서는 목이 터지도록 풍장(豊壯) 소리를 내질렀던 조도(鳥島) 어민들이 있었다.

“어하, 술비야 / 이 술비가 누 술비냐 / 박생원네 술비라네 / 어하, 술비야 어하, 술비야 / 술비로구나 / 이 술비가 어디를 갔다가 때를 찾고 / 철을 찾아 또다시 왔구나 / 그물코가 삼천이면 걸릴 날이 있다더니 / 우리네 망자에 배꽃이 피었다 / 오동추야 저 달은 밝은데 임 생각이 절로 난다 / 어하, 술비야 / 술비로구나 / 어하, 술비야 / 술비로구나” 

조선 말엽부터 조도 어민들이 닻배 조기잡이를 하면서 힘든 노동을 이겨내기 위해 불렀던 노동요로 여기서 ‘술비’는 조기를 끌어올리는 그물을 뜻한다. 

보통 ‘닻배’는 선원이 15명 내외로 그물 3~8 백발을 배에 싣고 조업이 시작되면 그물을 바닥에 닿도록 닻을 달아야 하기 때문에 1m 내외의 무거운 참나무로 만든 닻 50~60개 정도 싣고 다니는 배를 말하는데 지금의 유자망(流刺網, drift net: 조류를 따라 그물을 흘려보내 물고기가 그물코에 걸리거나 감싸게 하여 잡는 데 사용하는 어망)의 일종으로 병풍 그물을 쓴다. 

조선후기(1871년, 고종8년) 칠산 앞바다에서 닻배 조기잡이를 하는 모습
조선후기(1871년, 고종8년) 칠산 앞바다에서 닻배 조기잡이를 하는 모습

보통 조기 조업은 이른 봄부터 5월 중순 전후인 소만(小滿: 24절기 중 하나로 입하와 망종 사이에 들며, 음력 4월, 양력 5월 21일께가 된다.)까지 계속 바다에서 의식주를 해결하고 조업을 하기 때문에 애로가 많았다. 

어쩌다 만선이 되면 조기받으러 돌아다니는 상고선을 부르기 위해 돛 꼭대기에서 배 바닥까지 흰 백목 한필을 깃대 삼아 내려걸어 놓고 풍장 북을 쳤다고 한다. 

1928년 전남도내 조기 어획고는 총 236 만관으로 일본 어민이 65 만관, 한국어민이 171 만관(72.5%)의 어획고를 올렸는데, 그중 진도 어민이 36 만관(15.2%)으로 일본 어민의 절반 수준에 달했다. 당시 진도 어업은 주로 조도 어민들의 몫이었다.

그 당시 조도 어민들의 조기 조업이 얼마나 왕성했는지를 알 수가 있는 대목이다. 조도군도 전역에 닻배 조기잡이가 성행했으나, 대규모 닻배 호황의 중심은 ‘나배도(전남 진도군 조도면 나배도리 소재)’였다고 한다. 

그 후 광복 직전, 일본의 중선배가 등장하면서 닻배의 쇠퇴기를 맞게 되면서 6.25 이후 기동성을 갖춘 발동기 어선과 안강망 어선에 밀려 자취를 감추게 된다. 

‘조도 닻배 노래’ 공연을 펼치고 있는 조도 어민들 (출처: 진도군)
‘조도 닻배 노래’ 공연을 펼치고 있는 조도 어민들 (출처: 진도군)

다행히 찬란했던 닻배 조기잡이를 하면서 불렀던 ‘조도 닻배 노래’가 문화적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2006년 12월 27일 전라남도 중요 무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면서 조도 어민들의 생활상을 한눈에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렇지만, ‘조도 닻배 노래’를 계승 보존하고 있는 ‘조도 닻배 노래 보존회(회장 박종복)’측의 입장은 달랐다. 현재 “조도 관내에 닻배 노래 전수관 기반 시설이 없어 곤우 마을 쓰레기 매립장 공터에서 매번 연습을 하고 있다”면서 그에 따른 보존 후속조치가 하루속히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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