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산작가의 포토에세이-섬 이야기 2

도부꾼(徒負商: 자가에서 생산된 물건을 육지 농촌을 돌아다니며 곡식과 바꾸는 행상을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새섬 조도사람들의 도부의 역사는 굳이 역사서를 뒤지지 않더라도 우리들의 집안, 주변 이웃들이 농한기나 혹한기를 이용해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생활수단이었다. 물론, 필자의 집에서도 도부(徒負)의 기억은 아직도 어렴풋이 남아 있다.

행상을 떠나는 도부꾼 모습_ 작자 미상 (출처: 조도면지)
행상을 떠나는 도부꾼 모습_ 작자 미상 (출처: 조도면지)

조선 후기 상업이 발달하면서 전국 팔도 시골 장터를 찾아 다니거나 동네를 돌며 물건을 팔았던 보부상을 상징하는 봇짐장수나 등짐장수들이 성행했으나,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조선 침탈에 방해가 된다는 명목으로 탄압했고 본격 식민화 이후에는 소멸되었다.

일제 중기 무렵부터 새섬 조도에는 보부상 개념이 아닌 자생적 행상이 활발하게 발달했던 지역으로 손꼽힌다.

도부꾼(徒負商)이라 불렀던 조도 행상들은 닻배꾼(조기잡이 어선)들이 선상 위에서 건조시킨 말린 생선이나 밴댕이, 어민들이 낭장망에서 잡은 멸치나 톳, 가사리, 모자반, 김, 파래, 건조 해산물 등을 머리에 이거나 등짐을 지고 배를 타고 수십 수백 킬로 떨어져 있는 육지의 농촌이나 멀게는 경남 하동까지 봇짐을 지고 갔다는 보고가 있다.

작고한 장호암(조도중학교 서무과장 엮임)씨가 남긴 회고글 중에는 가장 조도 섬사람들이 도부의 밑천은 '뒤포리'(크기가 10cm이하의 청어과에 속하는 생선)일명 '밴댕이'라고 한다.

이 뒤포리는 섬섬코지기 마다 행터가 있어서 그물을 넣고 봄에는 멸치, 가을에는 뒤포리를 잡아 생선이 귀한 농촌마을을 이고 지고 돌아다니며 식량과 바꾸기도 했고 심지어 지붕에 이을 볏집과 바꾸었다는 기록이 있다.

도부의 흔적은 1920년 중반부터 시작해 197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도부꾼의 행상경로는 대한민국 전 지역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도시에서 젖 지게를 지고 다닌 사람들은 거의 조도 사람들이다"라는 풍문이 돌아다닐 정도로 유명하다.

광주광역시 양동시장내 조도출신 건어물 상인이 많았던 이유가 조도 조기잡이가 대풍의 연속으로 생산자가 유통자 역할까지 하면서 대성황을 이뤘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도부꾼들의 재미있는 일화가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남자 도부꾼들은 육지 여자를 데려와 부인으로 삼는 일도 있었고, 여자 도부꾼들은 육지의 부잣집 작은 댁이 된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새섬 조도 도부꾼들의 이야기가 아직도 회자되고 있는 이유는 그 시대의 경제활동이 얼마나 왕성하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저작권자 © 광주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