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쯤 국민들은 평창올림픽에서 쾌거를 이뤄낸 국가대표 선수들 덕분에 기분 좋은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특히 2월 10일에 열린 쇼트트랙 여자 3000m 계주 준결승에 참가한 선수들(심석희, 최민정, 김예진, 이유빈)은 기적에 가까운 실력을 선보였다. 23바퀴를 남긴 레이스 초반 이유빈이 중심을 잃고 넘어지며 한국팀은 최하위로 떨어졌다.

ⓒ심석희 선수 SNS 갈무리
ⓒ심석희 선수 SNS 갈무리

선수들의 고군분투로 한국은 11바퀴를 남기고 최민정이 3위 자리로 올라섰고, 엉덩방아를 쪘던 이유빈이 9바퀴를 남긴 상황에서 2위까지 치고 올라갔으며, 곧바로 심석희가 1위로 올라서는 저력을 발휘했다.

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올림픽 신기록까지 세우며 결승에 진출해 금메달을 목에 건 한국팀 선수(심석희, 최민정, 김예진, 김아랑)들은 국민들에게 잊지 못할 감동을 선사했다.

쇼트트랙 여자 3000m 계주 우승의 중심에 있었던 심석희 선수. 그녀의 가족과 지인들은 환호했던 국민들과 달리 금메달을 목에 건 심석희 선수를 보며 분노와 원통함을 삼키고 있었다는 것을 국민들은 1년이나 지난 지금에야 알게 되었다.

평창올림픽이 열리기 한 달 전 심석희 선수는 조재범 코치의 폭행을 못 이겨 아버지에게 “죽고 싶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훈련장이던 진천 선수촌에서 빠져나왔다.

혼비백산한 심 선수의 아버지는 딸을 찾으러 진천 선수촌으로 달려가 선수촌 인근의 저수지가 꽁꽁 언 모습을 보고서야 한숨을 놓았다고 한다.

폭력(성폭력)이라는 빙판에 넘어져 몸과 마음에 심한 상처를 입었음에도 오로지 금메달을 위해 묵묵히 일어나 다시 힘차게 달려왔던 심석희 선수에게 받기만 하고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그리고 엄청난 양을 자랑하는 대표팀의 고된 훈련과 폭력이라는 시련을 딛고 세계정상에 선 한국 체육계의 수많은 심석희들에게 존경과 위로를 표한다.

폭력이 문화로 자리 잡은 체육계의 고질적 병폐의 반복을 근절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분노가 아닌 자기성찰이다. 폭력은 오랜 세월 우리의 문화였으며 그 위력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폭력은 가해자가 원하는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가장 간편하고 효과적인 수단으로써 사용되어 왔다. 폭력이 옳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결과’라는 알리바이로 인해 폭력은 지금껏 정당화되어 왔다.

심석희 선수에게 가해진 폭력의 실상을 빙상계 내부에서 인지했음에도 ‘금메달’이라는 알리바이 덕분에 가해자들은 호위호식하며 때린 놈이 큰소리치는 적반하장의 태도로 삶을 일관해 올 수 있었다.

딸을 폭행한 코치에게 그것도 세계최강을 자랑하는 국가대표팀 코치에게 사과는커녕 “혼자 죽지 않을 테니 마음대로 해보라.”는 협박을 들었다는 심 선수 아버지의 증언은 폭력의 알리바이가 얼마나 강력한지 고스란히 보여준다.

위와 같은 폭력의 메커니즘을 고려할 때 심석희 선수 사태와 같은 ‘문화가 된 폭력’을 근절하는 일은 결과에 대한 열린 시각의 형성에서 시작한다.

체육계를 예로 든다면 지도자가 아닌 선수가 원하는 결과에 지도의 중점을 두는 방식의 패러다임 전환을 고려해 볼 수 있겠다.

체육계를 넘어 특정한 결과만이 인정받는 단일 결과 체계가 아니라 다양한 결과들이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체계를 사회적으로 형성해 나갈 때 우리를 둘러싼 문화에서 폭력이라는 환부를 드러낼 수 있다.

폭력이란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노력이 멈출 때 이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심석희 선수. ⓒ민중의소리 갈무리
심석희 선수. ⓒ민중의소리 갈무리

국가대항전이 열리거나 올림픽 시즌이 되면 한국 스포츠 문화의 수준이 드러나는 것 같아 얼굴이 붉어진다. 스포츠를 이기고 지는 식의 이분법적 태도로 바라보거나 메달로만 바라보는 문화가 한국 스포츠 문화의 현주소라 생각한다.

결과가 아닌 과정에 대한 응원과 사랑이 우리의 스포츠 문화에는 부족하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열광하는 결과라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준 국가대표 선수들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시킨 알리바이가 되었음을 우리는 성찰해야 하지 않을까.

삼국지에서 유래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불교의 인연설(因緣說), “주님 뜻대로 하소서.”와 같은 기독교의 정언 등은 결과란 사람의 뜻으로 이루기 힘들고,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결과의 본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결과란 ‘예상하여 머릿속에 그린 허구의 이미지’다.

이에 반해 과정이란 현재이며 실재다. 그리고 과정은 통제가 가능하다. 결과에 대한 과도한 사랑이 폭력을 문화의 일부로 만들었다면, 결과가 아닌 과정에 대한 사랑은 우리를 둘러싼 문화를 성숙시키는 문화투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윗 글은 <광주아트가이드> 111호(2019년 2월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http://cafe.naver.com/gwangjuartgu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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