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에곤쉴레 - 욕망이 그린 그림(2016)
[영화비평] 에곤쉴레 - 욕망이 그린 그림(2016)
  • 이현남 미술이론 박사과정
  • 승인 2019.01.06 21: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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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인 그림체로 잘 알려진 에곤쉴레(Egon Schiele)의 작품은 독특한 표현법으로 인해 누구나 한눈에 그의 그림인지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뚜렷한 개성을 보인다.

급진적 표현주의에 속했던 그의 작품 중 특히, 누드 스케치에 나타난 표현들은 선의 강약, 색감, 하다못해 공허한 배경까지 모두 다 강렬하다.

게다가 작품 못지않게 그의 삶도 작가다운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데, 화가 클림트와의 교우를 차치하고서라도 스물여덟에 마감한 짧은 인생마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죽음과 소녀. ⓒpinterest
죽음과 소녀. ⓒpinterest

이렇게 지극히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아낸 쉴레의 인생을 조망한 영화 ‘에곤쉴레-욕망이 그린 그림’(2016, 티터 베르너 감독)을 소개하고자 한다.

동시대에 공존했던 거장 클림트를 능가하는 재능으로 미술계를 뒤흔들 만한 입지를 보여주었던 쉴레의 삶은 제1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독감으로 혼란스럽던 1900년대 초반을 경유한다.

그의 어린 시절은 매독으로 정신이상 증상을 보이다 전 재산을 불태우고 사망한 아버지와 늘 차가웠던 어머니 사이에서 채워지지 않을 정서적 빈틈을 가진 채 시작된다.

학창시절도 순탄치 못해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고, 화가 클림트를 만나 ‘빈 분리파’의 일원이 되기도 한다. 이후 점차 자신만의 화풍을 추구하며 장식적인 아르누보를 벗어나 급진적 표현주의 화가로 변화하게 되는데 영화는 그의 삶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하나하나 짚어내며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영화의 시작과 끝을 나타내주는 메타포는 바로 ‘죽음’이다. 대략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을 시작으로 가장 사랑했던 애인의 죽음, 그리고 아내와 아이의 죽음, 이후 삼일 차를 둔 자신의 죽음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극중 죽음들은 쉴레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힌트로 등장하며, 그의 작가적 표현이 변화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어린 시절을 지배했던 ‘아버지의 죽음’은 쉴레에게 경제적 궁핍과 애정적 결핍을 던져준다.

정서적 빈틈은 공포를 수반해 만들어지기 마련인데, 불현 듯 떠오른 아버지의 형상에 어지럼증을 호소하곤 하는 그의 모습에서 공포감이 읽혀진다.

이렇게 아버지의 죽음은 쉴레에게 공포감을 알려주었고, 그 감정은 마치 ‘타나토스와 에로스’처럼 역설적이게도 죽음과 반대되는 ‘삶에 대한 집착과 욕망’으로 바뀌어 표출되게 된다.

그리고 삶에 대한 욕망은 ‘극단적 에로티시즘과 대상에 대한 집착’으로 변해 가는데, 이런 모습은 작품 ‘죽음과 소녀’(1915)에 등장하는 뮤즈 발레리와의 사랑과 창작과정에서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 그녀는 그의 예술적 영감을 가장 오래 지속시켜주던 뮤즈였다. 하지만 쉴레가 군대에 징집되어 그림을 더 이상 그릴 수 없게 되자 그의 꿈을 지속시켜 줄 수 없게 된 가난한 뮤즈는 쉴레로부터 버림받는다.

이 시기 그려진 ‘죽음과 소녀’라는 작품은 자신의 욕망을 지속시켜줄 중산층 여인과의 결혼을 앞둔 쉴레가 발레리와 이별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그림 속 애처로운 듯 그를 감싼 앙상한 여자의 팔이 마치 올가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림의 원제목은 ‘남자와 소녀’였다.

그러나 발레리의 죽음을 접한 쉴레가 ‘죽음과 소녀’로 제목을 바꾸었다. 남녀관계의 끝은 마치 죽음과도 같거니와, 그림 속 남자의 핏기 없는 얼굴에서 그녀의 죽음을 종용한 자신이 비춰지기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쉴레의 욕망은 무엇이었을까? 세상에 대해 반항아적 기질을 보였던 그는 늘 자유를 꿈꾸었다. 이런 그에게 과연 삶의 의미란 어떤 것이었을까?

세상에 그냥 내던져진 ‘기투존재’로서 인간의 본질(목적)은 실존(존재)에 선행되지 않는다는 사르트르의 언급은 인간 실존에 대한 것으로, 삶의 본질은 신이 정해 놓은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선택한다는 것이다.

자율적 선택은 ‘자유’를 기조로 하는데 이는 기존의 아카데믹한 미술에 대해 반기를 들며 인간 실존에 대해 고민했던 쉴레의 입장과도 닿아있다. 누군가 인생은 Birth와 Death사이의 Choice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가 선택한 삶의 본질은 바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고 따라서 그는 늘 삶의 갈림길에서 택했던 선택의 순간들이 준 의미를 통해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영화는 이 과정을 표현하고자 노력했고, 이렇게 화가로서 자신의 명분에 충실했던 쉴레의 작품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하지만 실존적 자유를 통해 자기의 존재방식을 결정하고 삶을 기획해가는 과정에서 발생했던 ‘선택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는 미성숙 하지 않았나하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 윗 글은 <광주아트가이드> 110호(2019년 1월호)에 게재된 것입니다. http://cafe.naver.com/gwangjuartgu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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