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대학신문은 2006년 한국사회를 정리하는 사자성어로 ‘密雲不雨(밀운불우)’를 선정했다. <주역>에 나오는 이 말은 '하늘에 구름은 빽빽하나 비는 오지 않는 상태'라는 말로, 여건은 조성됐으나 일이 성사되지 않아 답답함과 불만이 폭발할 것 같은 상황을 뜻한다고 한다. 우리 사회를 상징적으로 나타내준 말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상생정치의 실종, 대통령의 리더십 위기로 인한 사회적 갈등, 치솟는 부동산 가격, 충분한 사회적 합의 없이 진행된 한미 FTA 협상 등 사회 각층의 불만이 폭발 직전의 임계점에 도달했다. 또한 850만에 달하는 비정규직, 40만명에 이르는 청년 실업, 계속되는 불황 등 사회 양극화의 구조적 모순 속에서 서민들의 ‘민생고’는 언제 폭발할지 모를 ‘화약고’와 같은 처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신년 벽두부터 정치권에서도 자신들의 희망을 담은 신년 화두를 내놓았다. 열린우리당은 ‘무심운집(無心雲集)’, 한나라당은 ‘쾌도난마(快刀亂麻)’를 선정했고, 민주당은 ‘굴정취수(掘井取水)’를, 민주노동당은 불경에 나오는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를 제시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를 가장 잘 짚어내고 있는 화두는 신영복 선생이 즐겨 쓰는 ‘석과불식(碩果不食)’이 아닌가 한다. 세상의 초록빛이 다 사라지고 삭풍한파만 몰아치는 곤궁하고도 험난한 때가 ‘석과불식’의 때이다.

‘석과불식’이라는 말은 ‘씨과일은 먹는 것이 아니다’라는 뜻을 품고 있다. 배가 아무리 고파도 마지막 씨앗은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굶주린다고 씨앗까지 먹어버리면 내일을, 새 봄을 기약할 수 없다. 석과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하는 희망의 씨앗이다.

늦가을 잎이 모두 져버린 감나무 가지 끝에 빨간 감 한 개를 남겨놓은 우리네 조상들의 뜻이 여기에 있다. 김남주 시인이 “ 찬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조선의 마음이여.” 라고 노래한 바로 그 마음이다.

매서운 삭풍 속에 있는 석과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잎사귀를 떨어야한다. 거품을 걷어내고 화려한 의상을 벗었을 때 근간(根幹)이 보인다. 우리 사회의 근본구조가 드러난다. 나목처럼 우리 삶의 실상을 인식하게 되면 희망의 싹을 어떻게 틔워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떨어진 잎사귀가 뿌리의 거름이 되듯 절망은 희망의 싹을 틔우는 밑거름이 된다.

올해는 6월 항쟁 20주년을 맞는 해이며, 6월 항쟁 이후 체계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민주주의의 전망을 열어야 할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이다. 우리가 희망의 씨앗이 되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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