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는 특정 성별을 지칭하지 않을 생각이다. 세상에서 지정해준 성별과 다르게 자신을 생각하는 이들이 존재하고 있기에...하여 그/녀 혹은 그들이라고 지칭합니다. /글쓴이 주.
 

“치료 받을 수 있어요” “00섹스, 에이즈의 주범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서 당신들이 그러는 거니 돌아와요”
“뭐가 부끄러워서 사진을 찍지 말라는 거냐.. 그렇게 부끄럽냐”

몇 시간동안 행사장 입구에서 오고가는 참가자들과 반대를 하기 위해 온 이들의 경계에 서서 인권침해감시단을 하면서 들은 반대편에 있던 이들의 말들이다.

한 순간은 욱한 마음에 “당신들이 그렇게 조롱하고, 혐오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니 사진을 찍지 말라는 거 아니에요. 얼굴이 드러나면 당신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할지 이렇게나 뻔히 알겠는데 말이에요”라고 소리를 빽 하고 지르고 싶었지만, 우리가 정한 ‘무대응’의 원칙을 새기고 되새기며 참았다.
 

 

지난 22일 광주에서 처음으로 열린 퀴어문화축제장에 반대자들이 난입하려하자 경찰이 막고 있다. ⓒ광주인


몇 날 며칠을 들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하루 종일 들은 이야기도 아니었다. 단 몇 시간이었지만 그들이 내 뱉은 말들이 머릿 속에 맴맴 돌았고 그날 함께 인권침해감시단을 한 동료는 그 날 밤에 눈물이 나왔다고 했다. 그리고 한 동료는 무슨 큰 소리만 나면 화들짝 놀라 주변을 돌아보곤 했다고 했다.

 그 날의 기억들은 그렇게 몸에 새겨졌다. 그러므로 최초의 광주 퀴어문화축제가 있었던 10월 22일의 일은 기록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날 무슨 일들이 그 안에서 있었는지.. 그래야 우리는 한 걸음 더 앞으로 걸어갈 수 있고, 한 걸음 더 옆을 내다볼 수 있을테니..

1.
날이 쨍하게 밝았다. 옷을 챙겨 입고 나오며 한 켠 소풍가는 사람마냥 설레는 마음과 전쟁을 앞둔 사람같은 비장한 마음이 함께 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축제다. 축.제!!

행사장 근처에 도착하니 행사장 주변으로 펜스가 쭈욱 둘러 있었다. 참여자들의 안전을 위한 장치로써의 펜스.. 펜스 안과 밖은 도대체 무엇이 다르기에 이렇게 구분지어져야 할까..사색할 참도 없이 일 손이 모자르다 한다.

사전에 모집된 자원봉사자들과 인권침해 감시단으로 오신 변호사님들까지 손을 보태 천막에 놓여진 책상을 설치하고, 의자를 놓고..어느 새 행사 시작이 가까워져왔다.

그런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약간의 고성 소리!! 아뿔사.. 벌써 마찰인가 싶어 그 주변으로 달려가 보니 아까 반갑게 인사했던 다른 지역에서 축제를 함께 하고자 온 이가 펜스를 앞에 두고 어떤 이와 말다툼 중이었다.

“어라, 0자 인 줄 알았더니만 아니네, 0자 0자.”

조롱섞인 말을 악담처럼 퍼붓는 그 사람의 입에서 “거기가 어딘 줄 알고, 너 같은 것이 있어. 나 5. 18 당사자야” 라는 말이 나왔다.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장면을 마주하고 만 것이다.
 

지난 22일 제1회 광주퀴어문화축제 참가자들이 5.18민주광장 앞 도로를 행진하고 있다. ⓒ광주인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그 자리에 온 이들과의 마찰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 것은 말 그대로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합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고..

하지만 5.18 당사자와의 마찰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되고 마는 것이니..

 ‘광주에서 왔어요’라고 다른 지역 회의에 참여했을 때 나를 대하는 이들의 호감어린 표정을 보아왔다. ‘광주는 이러이러하지요’ 기대에 찬 얼굴로 이야길 하는 이들.

“5.18 사진을 대학시절 보고 내 인생이 달라졌어요”라고 이야기하던 다른 지역 선배들도 많이 보아왔다. 그리고 공장으로, 거친 현장으로 갔다는 이들의 고백을 들었다. 그리고 그 들에게는 한결같은 부채감 같은 게 느껴졌다.

5.18 당시 광주에서 외롭게 죽어나갔던 이들과 이후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싸운 유가족들과 당사자들의 싸움에 당시 함께 하지 못했다는 부채감.

 당시 소외된 이들 없이 각자의 자리에서 그 싸움을 함께 했던 역사는 늘 그들에게 어떤 감동과 자극을 주는 듯 했다. 시장 할매들은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들을 먹이고, 그가 어떤 누구든 가리지 않고 함께 시민군이 되고, 홍보방송을 하고, 상무관에서 시체를 살피고, 또 살폈던.. 돈의 많고 적음도, 초등학교 졸업인지 대학생인지도, 화이트 칼라 노동자인지 신발을 수리하던 이인지도 상관없었던 그 때의 그 주먹밥 공동체가 살아있던 그 광주.

그런 광주를 경험한 이가 가장 앞에서 차별과 배제를 받고 있는 타지인에게 ‘너가 왜 그 자리에 있냐’는 질문은 그러므로 잔인했다.

 변호사님들이 달려와 상황을 정리하고, 악담을 들어야 했던 그 이에게 갔더니 그의 눈과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2.
 행진 전, 갖 가지 부스가 열렸다. 행진 전까지 나의 임무는 부스 지킴이.

부스에서 후원 물품을 펼쳐놓고 물품을 안내하고 있는데 우리 부스 앞에 ‘성소수자 부모모임’ 엄마, 아빠들이 ‘안아드릴게요. 프리허그’라는 피켓을 들고 오고가는 참가자들을 안아주고 계셨다. 그 장면이 너무 따스해 한참 바라보고 있는데, 두 명의 청소년으로 보이는 참가자들이 한 엄마에게 오래도록 안겨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안아주고 있는 엄마는 두 사람의 귀에 계속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고, 그 이야길 듣고 있던 두 사람은 연신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울고 있었다. 그 장면을 나도 오래도록 지켜보았고 부스에 함께 있던 이와 손을 잡고 피켓을 들고 있던 한 엄마에게 달려가 안겼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 분의 목소리가 귓 가에 들려왔다. 눈물이 나왔다.

 그 날 많은 청소년들로 보이는 참여자들이 보였다. 참여자들의 80%는 청소년들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많은 숫자였고, 준비했던 우리도 놀랐다. 그들은 그 자리가 너무 흥겨워보였고, 신나보였다.

 누군가는 ‘걔들이 어려서 뭘 몰라서 거길 간거다’라고 폄하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왜 그들이 일요일, 그 광장에 모였는지 생각해보지 않는다면, 장담하건대 우리 모두는 이 사회에서 결국은 ‘꼰대’의 가장 앞 자리에 있게 될 것이다. 

 ‘뭘 할 때 가장 행복해요?’ ‘어떤 사람에게 끌려요?’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이 질문을 듣지 못한 채 자란 우리 세대와 이런 질문을 스스로가 하며, 적극적으로 답을 찾아가는 세대의 시대는 다를 것이며,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3.
 

지난 22일 5.18민주광장에서 열린 퀴어축제에 참가자들이 모이고 있다. ⓒ광주인


‘빨리 광주에서 나가요’
 그 날 행진 때부터 행사 마무리까지 우리를 쫓아다니던 반대 측 이들이 한결같이 한 이야기이다. 광주에는 성소수자들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 절대적인 확신!!

그래서 그 날 행진하며 외쳤던 ‘광주에도 성소수자는 살고 있다는 구호는 구호가 아닌 절박한 외침이기도 했다.

 오늘 당신이 오고가는 그 길에서, 당신이 따스한 오뎅국물과 호떡을 베어무는 그 포장마차 옆에 서 있는 이가, 때론 당신이 넘어져 도움이 필요한 그 순간 당신에게 손을 내미는 이가 성소수자 일 수 있다. 당신이 보려한다면, 당신이 함께 하고자 마음을 여는 그 순간.

나는 마지막으로 조롱과 혐오가 함께 했던 그 날의 이야기가 자칫 ‘그들이 소수이고 약자이니 도와줘야 한다’ ‘그러니 함께 해야 한다’라는 말로 들리길 원치 않는다.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에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우리 함께 일해봅시다.'-멕시고 치아파스 원주민

나는 이 원주민의 말처럼 그들의 인권은 나의 인권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함께 가지길 원한다.

우리가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파업을 하는 노동자라는 이유로, 피해자 답지 않은 성폭력 피해자라는 이유로 내 주변에 있는 이들을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공동체에서 그 원 밖으로 몰아낸다면 결국 우리는 홀로 남게 될 것이니. 그 것도 보장할 수는 없지만..

 

저작권자 © 광주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