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프랑스의 석학 자크 아탈리는 ‘호모 노마드’ 서장에서 돌궐족 명장 톤유쿠크의 비문을 들어 ‘유목하는 인간’을 인류사의 개척자로 주장한 바 있다.

중앙아시아 각지를 떠도는 투르크-몽골계 유목부족들을 통합하여 세계역사상 가장 광대한 몽골제국의 기틀을 다졌던 칭기스칸 테무친(1162~1227). 혹자들의 이러저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은 8백년이 경과한 지금 몽골인들의 가슴속에 위대한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동하는 자들의 왕. 그의 흔적을 찾아나서는 일이야말로 몽골의 역사와 사상을 이해하는 첩경이 아닐까. 일행은 토요일 아침 일찍 하라호름으로 향하는 길을 잡았다. 울란바토르 남동쪽으로 350㎞ 지점, 우르브항가이에 속하는 인구 1만여 명의 소도시로서 옛 몽골제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1203년 칭기스칸의 군대와 동부 몽골의 패권자였던 나이만 왕국이 마지막 전투를 벌였던 장소이기도 하다. 당대에 대제국을 호령했던 성채는 칭기스칸의 사후인 1235년에 후계자 오고타이(셋째 아들)가 건설했으나, 1388년 명나라의 홍무제가 파괴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길은 매우 멀었지만 차창 밖 풍경은 하얗게 덮인 초원과 눈이 시리게 푸른 하늘로 경이롭다. 필자는 이처럼 길게 펼쳐진 도로를 본 적이 없다.

직선으로 뚫린 길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도중에 만난 낙타들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배설물을 촬영하도록 연출해 주었고, 석양녘에 낙타를 타고 산에서 내려오던 사람들은 일행을 낙타 등에 태워주기도 했다. 도로 곳곳이 끔찍하게 파손된 탓에 주변의 비포장 길을 선택하는 상황까지, 여덟 시간에 걸친 여정은 색다른 체험의 연속이었다.

네마(28)씨의 게르에 초대되었다. 안내자인 부렙씨와는 동서지간이며, 하라호름의 경찰관이다. 부인인 토오트가 내주는 수테차와 양고기 요리로 피로를 푼 일행은 게르의 안락함을 즐기며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속쓰린 배를 움켜쥐고 변소로 가던 길에 까치울음이 들렸다. 몽골에서도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단다. 까마귀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까지도 닮았다.

에르덴 쥬(Erdene Zuu). 몽골 최초의 라마불교 사원으로서 역사문화유산인 이곳은 옛 몽골제국의 성채가 있던 자리를 기념해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칭기스칸이 타문화에 개방적이었던지라 다양한 종교가 유입되었고, 그 중 라마불교는 몽골의 대표적 종교가 되었다.

샤머니즘을 비롯한 민간신앙과 더불어 이 땅의 민중들에게 깊게 뿌리박은 이 종교는 ‘부처의 현신’으로 추앙되는 달라이 라마를 정점으로 한다. 그 상징적인 사원 중 하나가 에르덴 쥬다. 일행이 관람하는 동안 어린 라마승들이 대사원을 향해 총총히 걸어 간다.

1월 24일 수요일. 우리는 헨테이로 향한다. 다시 3백㎞의 긴 여정을 시작하지만, 전날 모두가 답사코스에 관한 기본학습을 한 터라 기대가 크다. 도로사정은 하라호름 쪽보다 훨씬 낫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질 무렵부터는 초원을 가로질러 길고 긴 비포장길을 내달려야 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이 길은 몽골이 자랑하는 초원 관광길의 백미라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서 만난 야생 순록떼의 감동이란! 한국의 북방에서는 벌써 사라져 버린 순록이 몽골초원에서 말무리 사이를 펄펄 내달리고 있다.

헨테이 지역은 테무친의 고향인 아부르가 마을과 1204년 칭기스칸으로 추대된 장소인 쿠두아랄, 그가 성장기를 지냈고 나중에 부족장들의 최고회의인 쿠릴타이가 열렸으며 텡그리(하늘)에 천제를 올렸던 북방의 부르한 할둔 등 몽골인들의 성소가 포진해 있는 곳이다. 우리는 기상악화를 우려하여 부르한 할둔을 포기하고 아부르가를 목적지로 삼았다.

부르한 할둔을 가지 못한 점은 아쉽다. 백두산의 옛 이름이 부르한의 한문식 차용어인 불함이다. 곧 방문하게 될 브리야트에서는 바이칼의 부르한 바위를 성소로 여긴다. 때문에 학자들은 한민족의 근원을 찾아가는 중요한 맥락으로 본다. 지적 호기심이 어찌 발동하지 않겠는가?

아부르가 마을의 잠자리는 다우가(30)씨의 게르이다. 이미 세 번의 게르생활로 단련된 일행은 주인과의 인사치레에서도 자연스럽다. 우리가 머문 자리는 칭기스칸 군대의 숙영지이며 이곳에서 3㎞ 떨어진 오르혼강 유역은 ‘칭기스 쿠두아랄’로 불린다. 칭기스칸이 탄생된 자리라는 뜻이다. 그 아래 테무친의 탯자리로 추정되는 터가 있다고도 한다.

일행은 얼어붙은 강을 건너 칭기스칸이 참모들과 작전회의를 가졌던 유적지까지 답사하고 돌아왔다. 몽골인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기억되는 칭기스칸에 대한 단편적 접근은 경계되어야 한다. 그러나 세계 역사를 변동시켰던 13세기 몽골제국에 대한 관심과 조심스러운 접근은, 서구 중심의 세계관을 극복하려는 당대의 시야를 확보하는데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1240년에 쿠두아랄에서 쓰여졌다고 전하는 ‘몽골비사’ 외에는 그 역사에 관한 성실한 기록이 없다. 경도된 서구적 시각과 중국 중심의 역사편입 시도로 몽골사를 비롯하여 한국사, 티벳사 등이 왜곡되고 있는 현실이다. 칭기스칸의 정복은 아시아와 유럽의 문명교류를 확장시키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역시 프랑스의 석학인 르네 그루쎄는 ‘유라시아 유목제국사’에서 칭기스칸과 몽골제국을 섬세하게 서술해 놓았으며, 자크 아탈리도 칭기스칸을 파괴자가 아닌 새로운 문명의 개척자로 보고 있다. 세속에 대한 초월적 태도와 상상력으로 아시아를 통합한 인물.

자신의 무덤조차도 남기지 않았던 한 영웅의 삶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글을 쓰는 지금도 “추~추~” 소리내어 말을 몰던 유목민들의 모습이 선연하다. (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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