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상 심사 3번째 상영작은 신인 감독 권종관 감독의 S다이어리였다.

이 영화는 탄탄한 스토리에 힘입어 영화계에서 김선아의 존재감을 확인시킨 작품으로 자신의 연애담을 꼼꼼히 다이어리에 기록하는 한 여자가 과거의 남자들의 가벼운 사랑에 일침을 가하는 가볍지만 무거운 영화이다.

영화가 끝났을 때, 많은 자본투자 없이 생각보다 깐깐하니 잘 만들었다는 심사위원들의 찬사가 쏟아진 작품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제목에서 주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지적사항으로 나왔다.차라리 탁 터놓고 “섹스 일기”로 가면 훨씬 더 김선아의 이미지와 자연스러움이 맞아 떨어지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많은 작품이라 심사를 맡았던 전문위원들 간에 여러 가지 의견들이 다양하게 쏟아져 나왔다.

많은 배우들이 한 작품이 끝나면 약간의 공백이 생긴다.
모든 걸 보여줬기 때문에 다음엔 또 뭘 보여줘야 하나라는 혼란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 사이 자연스럽게 슬럼프에 빠지기도 하고...

그러나 김선아는 그런 혼란이나 슬럼프에서 비켜나 있었다.
여성스러움도 섹시함도 미모도 탁월하지는 않지만 천 가지 색깔과 천 가지의 표정을 다 보여줘도 늘 더 보여줄 것이 남아 있는 듯한 여배우. 그러기 위해서 얼마나 자신을 담금질 하고 있는 걸까? 그녀의 다양한 변신과 도전엔 브레이크가 없어 보인다.

내가 알기에 이 작품에서 열연을 한 김선아와 공유는 바로 “잠복근무”에서 또 다시 호흡을 맞출 기회를 갖는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살펴보자면 틀린 건 바로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출판업계 오타수정 전문가 나지니(김선아분)와 세 남자와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랑에 빠지면 상대방에게 모든 걸 아낌없이 쏟아 붓는 그녀의 보물 1호는 어린 시절부터 꼼꼼히 써 온 사랑의 추억이 가득한 일기장이다.

어느 날, 사랑을 완성할 나이 스물아홉에 듣게 된 인정할 수 없는 그의 한 마디. “야, 그게 사랑인 줄 알아? 옛날 남자들한테 가서 물어봐. 널 사랑했는지!” 1주년 기념일에 네 번째 남자, 찬이에게 이별통보를 받은 그녀는 이별의 순간 그녀에게 날아온 가슴 아픈 말을 되새기며 다이어리 속에 소중하게 간직해 온 지나간 사랑들을 떠올려 본다.

구현오빠(이현우분)와의 풋풋했던 첫사랑, 캠퍼스를 함께 누비던 정석오빠(김수로분)와는 아름답기만 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찬이의 말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는 지니는 ‘그 남자들은 날 사랑했을 거야’라고 혼자 곰씹는 대신 직접 찾아가 지나간 사랑을 확인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남자들은 더 이상 다이어리 속에 지니의 필체로 간직 된 아름다운 남자가 아니었다.

세 남자는 전혀 다른 얼굴로 사랑을 부정하고 지니의 추억마저 산산조각 박살 내 버리고 만다.기록 당한 남자들을 위해 다이어리를 펼쳐 든 그녀의 정정당당 청구내역. ‘일 센티도 안 빼놓고 다 적어 놨거든. 반드시 꼭! 받아 낼 거야!’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세 남자들을 만나면서 사랑의 첫 떨림부터 헤어짐의 순간까지 빠짐없이 써 내려간 세권의 다이어리뿐이다.

지니는 추억을 부둥켜안고 우는 대신, 자신의 사랑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 다이어리를 증거로 작성한 치밀한 청구서를 남자들에게 날리며 옛 남자들을 향한 그녀의 경고가 시작된다. 그날 이후 과거의 남자들은 좌불안석, 불안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영화는 세 남자의 사랑을 향해 문을 연다.

   
첫 번째 남자, 지니가 여고생 시절부터 짝사랑했던 전설의 성당 오빠.

사랑이란? 그 사람 모르게 내 마음을 건네주는 것이라며 성당에서 짝사랑을 키워왔던 지니.

재수 시절 과외선생님이기도 했던 그는 엄마의 장기여행을 틈타 열아홉 살 지니에게 갑작스런 첫경험을 안겨 준 장본인이다. 도망치듯 갑자기 유학을 떠나 버린 지 10년, 신부님이 된 구현을 찾아간 지니는 단지 과거의 사랑을 확인하려 했을 뿐인데…구현은 지니의 아름다웠던 첫사랑을 ‘하느님께 이미 용서 받은 죄’로 치부하고 만다.

사랑을 받을 줄 모르니까 줄지도 모르는 바보라며 흐느끼는 지니는 날벼락 같은 1,000만원의 청구서를 보내고 청구서를 받은 구현은 “그건 사랑이 아니야… 그때 우린…요, 욕정의 노예였을 뿐이야” 구현은 지니의 치열한 작전에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송금을 하고 만다.

밤늦게 돌아다니는 딸 지니를 나무라는 지니모(나문희분)는 뭐 하느라 밤늦게 새벽까지 쏘다니냐며 딸을 나무란다.
지니는 “잃어버린 나를 찾으러.” 라고 말한다. “그래 찾았냐?” “아니, 찾으면 제일 먼저 엄마한테 말해줄게. 나한테 어울린 것도 모르고...” “죽고 싶어 이년아!”

지니는 두 번째 남자, 학교선배였던 정석오빠는 설마하고 찾아가지만 ‘무슨 씹다 버린 껌도 아니구, 이렇게 들러붙는 속셈이 뭐야?!’ 며 따지고 드는 정석에게 지니는 무지 슬프다.

지니의 대학시절, 함께 오토바이로 캠퍼스를 누볐던 터프한 복학생 선배였고 정석오빠 땜에 카드도 존나 긁었는데....

비록 가난한 지하 자취방이었지만 지니에게 함께한다는 행복을 처음으로 가르쳐 준 남자이기도 하다.

“만리장성 갔다 왔지.” “중국집?” “은장도 넣어도 시원찮을 판에 콘돔을 넣어줘.” “난 널 감당할 수 없어.” “먼저 떠난다는 말이 이런 기분일까?”

‘사랑하지만 헤어진다.’ 는 말을 남긴 채, 결혼에 대한 꿈으로 부풀어 있던 지니를 떠난 후, 지금은 장인빽으로 어엿한 대한민국 경찰이 되어있다.

정석은 경찰서로 찾아 온 지니를 다짜고짜 ‘씹다 버린 껌’ 취급하는 결정적 실수를 저질러 그녀의 청구서 1,058만원의 발급 대상이 되고 만다.
이별 후, 정석오빠의 체취는 카드고지서에 실려 계속 배달되었는데... 쫀쫀하고 소심한 그를 지옥으로 내모는 그녀의 특별한 계획은 시작된다.

   
그녀의 세 번째 남자는 귀엽고 쿨한 영계 아는 동생 유인이다.
‘차라리 내 몸이 그리웠다고 솔직히 말해. 그럼 알아? 다시 만나줄지..’ 지니에게 백만 볼트 짜릿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해 준 연하의 애니메이터.

시도 때도 없는 과감한 애정 행각과 연하의 애교로 무장한 거부할 수 없는 플레이보이다.

유인의 끝없는 작업(?)에 지치고 상처 받은 지니는 결국 그를 떠나고…3년 후, 솔직한 대답을 기대하고 사랑을 묻는 지니에게 ‘나이든 여자’ 운운하며 두 주먹 불끈 쥐게 하는 모욕적인 말을 퍼부어 문제의 1190만원의 청구서를 날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물론, 엄마와 애완견만이 유일한 아킬레스건인 유인에게도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그녀의 치밀하고 독한 작전에 손을 들고 만다.

세 남자에게 입금된 통장을 보는 지니는 목적은 달성했지만 씁쓸한 기분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지니는 잃어버릴 줄만 알았던 그 추억들이 자신을 붙잡아 주었고 아무것도 아닌 모든 것들이 추억이었음을 깨달으며 잃어버린 자신을 찾으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김선아 아니면 안 된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그 자신이 캐릭터에 철저히 몰입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데뷔 12년 만에 첫 멜로 연기에 도전했다는 김수로는 개성만점의 멜로 연기를 선보인다. 어떤 장면에서든, 어떤 배역으로 등장하든 특별한 존재감으로 시선을 빼앗는 그는 연구하는 노력파로도 정평이 나 있다.

기가 막힌 애드립 역시 배역과 상황을 철저히 분석하는 탐구정신의 결과. 항상 준비하는 열정이 그의 유쾌하고 건강한 매력을 만나 에 강력한 코믹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는 평가다.
또한 처음 도전하는 키스 씬, 베드신에서도 그의 현란한 애드립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고 하니 ‘김수로식’ 멜로 연기 또한 기대해 봐도 좋을 듯하다.

경희대 국문학과를 나온 신인 권종관 감독은 이 작품에서 탄탄한 연출력을 인정받아 2005년 눈물을 짜게 만드는 영화가 아닌 눈물을 고이게 만든 “새드 무비”란 작품으로 다시 한번 기대해도 좋을 충무로의 감독으로 떠올랐다.

 

   
문성룡님은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이사이며 한국영상작가교육원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영화일꾼입니다. 지난해에는 대종상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고 또한 광주시문화예술대상을 수상했으며 스크린 쿼더 축소반대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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