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에 새겨진 백제의 꿈, 바람이 불면 되살아 나는

개암사 가는 길에 윤구병 선생이 동행했다. 이 책의 뒤쪽에서 평화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는 농부철학자. 변산에 터를 잡고 공동체를 일군 지 20년이 넘었다. 동네 터줏대감에게 가는 길에 인사드렸더니, 대뜸 배낭 하나 둘러메고 따라나섰다.

“개암사 간 지도 오래됐고 같이 갑시다.”

“저야 좋지만, 바쁘지 않으세요?”

“나는 열반이 가까워서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쓰지. 노인이 바쁘면 제때 떠날 수가 없어요.”
 

ⓒ월간 불광 제공


변산 공동체에서 개암사까지는 약 30km, 가는 길에 밤꽃이 군데군데 피어 있다. 사월에 벚꽃 필 때, 유월에 밤꽃 필 때, 검은 머리에 곰발 나듯 짙은 초록의 숲이 희끗희끗하다.

“밤꽃이 왜 밤꽃인 줄 알아?”

“밭매던 여자가 호미 던지고 떠난다는 밤꽃 아닙니까? 꽃이라고 하기에는 이쁘지도 않고 서숙같이 늘어지는데, 저것을 향기라고 해야 할지, 냄새라고 해야 할지….”

“남자한테는 냄새지만, 여자한테는 향기라. 밤을 유혹하니까 밤꽃이지. 근데 호미 던지고 떠난 여자들은 다 어디로 갔어? 혼자 사는 내 집은 찾아주지도 않고.”
 

ⓒ월간 불광 제공


개암사 올라가는 숲길이 좋다. 전나무, 밤나무, 팽나무 우거진 숲을 지나 돌계단을 오를 때, 저 시원始原으로부터 솟아오른 꼭대기의 우금바위, 그 아래로 한 뼘씩 산이 내려간다.

드디어 대웅전 용마루의 수평이 드러나고, 까치의 꽁지깃처럼 날아오른 팔작지붕의 추녀와 처마, 5백 년의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들보와 민흘림기둥, 그것들을 떠받치고 있는 천연의 기단석까지, 한 걸음 한 걸음 베일이 걷히듯 드러나는 대웅전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 개암사의 백미다.

백제 우왕 때인 634년 창건되었다고 하나 그 아득한 흔적은 돌과 바람에 묻혀 있고, 1636년 조선 인조 때 지은 대웅전이 오랜 세월을 감내하며 제자리에 서 있는 보물이다.

우리는 저녁 공양할 즈음에 주지 무등無等 스님과 인사했다. 윤 선생이 “20여 년 전인가요? 개암사 중창하면서 혜오 스님이 고생 많이 하셨다.”고 얘기를 꺼내자 “맞습니다. 제 사형이신데, 당초 대웅전과 요사 한 동에 불과했던 것을 축대와 돌담을 쌓고 불사를 일으켜 어엿한 도량으로 가꾼 것”이라고 했다.
 

ⓒ월간 불광 제공
ⓒ월간 불광 제공


“새로 당우를 지으면서 크게 하려고 욕심내지 않고, 대웅전에 맞춰 소박하게 했는데, 그것이 지금 잘 어울린다.”고 윤 선생이 전했다. 스님은 대웅전으로 향하는 계단 위에 누각을 하나 세울 계획이다. ‘청허루’라고 하여, 1층은 통로고, 2층은 강당으로 쓰려고 한다. 그 일 때문에 고사도 지내야 하고, 관청과 협의할 일도 많아 분주했다.

“스님, 고사 지내는데 돼지머리를 올려야 하나요?”

이런 난데없는 일이 있나! 공양주보살 입에서 떨어진 질문이다. 보살님이라고 하기는 좀 젊고, 절에 와 살림을 맡은 지 채 한 달이 안 됐다고 했다.

웃지도 화내지도 않는 스님 답이 걸작이다. “올리면 좋지. 정 올리고 싶으면, 우리 신도 중에 그림 잘 그리는 사람 있지요? 수박에다 돼지머리 그려서 올리면 되겠네.”

아하, 저런 방법이 있구나, 우리는 탄복하고 한참 웃었다.
 

ⓒ월간 불광 제공


“스님 법명은 ‘시무등등주是無等等呪’에서 따온 것인가요?” 하고 내가 물었더니, “수계할 때 은사스님이 묻더라고, 집이 어디냐고. 그래서 광주 근처라고 했더니, 거기 무등산이 유명하지? 무등으로 해라,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지은 거요.”라고 했다.

말이 그렇지, 무등은 무엇이 더 높은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은 상태를 뜻하는 것이며, 아무 생각 없는 것은 ‘무념無念’의 경지와 같은 말 아닌가! 도새, 새기기 나름이다.

이튿날 새벽 능가산에 올랐다. 대웅전 우측 길을 따라 8백여 미터, 20분 정도 올라가니, 우금바위의 밑동에 닿는다. 바위를 오목하게 파낸 굴이 큰 것, 작은 것 두 개 있다. 백제 부흥군을 이끌던 복신이 은거했다 해서 이름 붙은 ‘복신굴’이다. 남향으로 수직 절벽인 바위를 뒤로 돌아 오르는 데 상당히 험하다.

어느 산이나 그렇듯이 가리는 데 없는 곳이 정상이다. 바위 꼭대기에 오르자 갑자기 탁 트이고, 사방팔방이 발아래 굽어 보인다. 원근법이 작동하여 개암사는 어느 묏동처럼 작아 보이고, 운동장 몇 개는 들어갈 개암저수지도 동네 빨래터처럼 자그마하다.
 

ⓒ월간 불광 제공


동으로 부안 김제의 너른 들이 있고, 서쪽으로 바다를 끼고 돌출한 이 반도의 지형이 과연, 옛 변한의 왕궁 터였으며, 백제 부흥의 마지막 저항지였다는 사실이 와 닿는다.

우금바위에서 산의 양편 기슭을 따라 사방으로 십 리에 둘러쳐진 것이 우금산성이고, 그 안에 마름모꼴의 땅이 약 6만여 평에 달한다. 꽃 피고, 새 울고, 녹음이 짙어가는 이 평화로운 땅이 1,300여 년 전에 피비린내 나는 전장이었으며, 삼계화택의 지옥이었으니.

660년 백제의 패망 직후 망국의 유민을 규합하여 백제 부흥운동을 이끌던 복신 장군이 나당연합군의 김유신 소정방을 맞아 최후의 저항을 벌이다 궤멸된 곳이다. 

산에서 절로 내려오는 길에, 나라 잃은 유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생각이 많다. 차를 한잔 나누면서 스님에게 물었더니, “백제 도공이 유명하잖아요. 곰소 근처에는 도기를 굽던 가마터가 많은데 그 흔적으로 봐요.
 

ⓒ월간 불광 제공


거기서 뱃길로 강진으로 내려가 일부 정착하면서 도자기를 굽고 살았을 것이고, 또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왜로 건너갔지요.” 하면서 일본에 남아 있는 백제의 혼들이 다 그때 떠난 사람들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곡우 즈음에 첫차를 따서 우금바위 ‘원효굴’에서 의례를 갖는데, 그것 역시 원효 대사에 대한 헌다 외에 백제 유민들의 넋을 위로하는 뜻도 들어 있다고 스님은 설명했다.  

개암사는 죽염이 유명하다. 송진으로 1,300도에서 아홉 번 구운 개암죽염은 예부터 절에서 비방으로 내려왔고 약으로 쓰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스님들에게 전수되기 마땅치 않자 정다운 스님의 동생이 비법을 이어받아 민간에 죽염회사를 차렸고, 오늘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 무렵 효용이 다하자 대밭은 차밭으로 변했다. 개암사 차는 전차錢茶가 특이하다. 우전·세작·중작은 보통 차로 담아 쓰고, 유월에 잎이 큰 것을 따로 따서 절구에 찧어 동전 모양으로 만든다. 우리가 갔던 그날은 동네 신도들이 모여 차를 따고 찧고 빚는, 전차 만드는 날이었다.

“요새도 만공 선사 자주 뵙는가?”

“선사가 덕숭산을 출발하셨습니다.”
 

ⓒ월간 불광 제공


절에서 나와 다시 변산 공동체로 가는 길에 윤 선생이 묻기에, 내가 답했다. 만공은 가득할 만滿에 빌 공空이다. 비어 있는 것이 어떻게 가득할까? 그것은 한량없는 깨달음에 관한 역설이다. 법정 스님의 ‘텅 빈 충만’처럼.

그런데 윤 선생이 말한 만공은 그렇게 거룩한 뜻이 아니라, 뒤의 공, ‘비어’가 영어다. ‘가득비어’는 ‘가득비어(beer)’이고, 맥주가 가득한 상태를 말한다.

500cc 생맥주잔에 비어가 가득하고, 거기에다 소주를 좀 탄 곡차를 자주 마시냐는 뜻이다. 이럴 때는 “여일如一하시옵니다.” 하면서, 깔깔대고 웃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재개그’보다 훨씬 허망한 자칭 ‘할배개그’를 상대가 웃을 때까지 계속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길로 만공 선사를 뵈러 갔다. 거기, 여태 떠도는 백제의 유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 이광이는 전남 해남에서 1963년에 태어났다. 조선대, 서강대학원에서 공부했고, 신문기자와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산과 절이 좋아 늘 돌아다녔다. 한때 조계종 총무원에서 일하면서 불교를 더욱 가까이 하게 됐다. 음악에 관한 동화 <엄마, 왜 피아노 배워야 돼요?> 등이 있다.

** 윗 글은 월간<불광>에 연재 중인 <이광이의 절집 방랑기>를 출판사와 필자의 허락을 받고 재게재한 것 입니다. (www.bulkw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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